문화사회

평창동계올림픽, 여자컬링대표팀에 열광한 이유에 대해

까칠부 2018. 2. 25. 11:47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은 정말 유명하다. 참 여러곳에 자주 많이 쓰인다. 나도 많이 쓴다.


일단 살아야 하니 먹고 자고 번식을 위한 섹스에 신경쓰고, 그런 것들이 다 충족되고 나면 이제는 좀 더 안전하게 살아야겠다, 그리고 좀 안전해졌으면 어딘가에 속해서 사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가기를 바란다. 그 다음이 바로 권력과 명예와 성취에 대한 자기존중의 욕구다. 그럼 마지막은 무얼까?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그야말로 먹고 사는 것이 전부였었다. 폐허 위에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다른 것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심지어 가족마저 돌아보지 않은 채 먹고 살기 위해서 그저 앞만 보며 달려야 했던 세월이었었다. 그리고 겨우 주위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쯤 국제사회라는 새로운 경쟁무대가 보이게 되었다. 정확히 군사독재정권이 그러도록 유도했다.


어느 정도 북한의 위협이 해소되자 이제는 어딘가에 소속되기를 바라게 되었다. 될 수 있으면 보다 높은 곳에, 더 명예로운 위치에. 선진국은 그런 대한민국이 마침내 이루어야 할 목표였다. OECD평균은 그래서 대한민국에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주문과도 같았다. 세계가 우리를 과연 어떻게 볼까? 무엇이라 평가할까? 그래서 금메달도 따야 했었다. 가난에서 딛고 일어나서 세계의 강자들과 겨루어 마침내 승리하고 금메달을 따내야 했었다. 그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명예이고 성취였고 대한민국 국민의 존엄이었다. 그렇게 믿었었다.


하지만 1988년 올림픽에서 종합 4위에 오르면서 스포츠에서 그같은 목표는 일단 어느 정도 달성된 듯 보였다. 이후 올림픽에서도 꾸준한 성적을 통해 우리의 위치가 이 정도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2002년 월드컵 4강은 그야말로 화룡점정과 같았다. 에이 설마 여기까지 했는데 이 이상 욕심낼 필요가 있는가. 원정 16강까지 이루고 나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확실히 그 즈음부터 올림픽이든 월드컵이든 국민적 관심이 많이 떨어지고 있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고 월드컵 4강 간다고 뭐 좋은 게 있겠는가.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국제대회에 대한 관심은 다른 이유로 매우 높은 편이다.


그 다음 단계인 것이다. 금메달도 따 보았고 세계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나름대로 세계적으로 내세울만한 경제적 문화적 성취도 이루었다. 그러면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바로 자아라는 것이다. 실존이다. 진정 내가 좋아하는 것이다. 추구하는 것이다. 그 자체를 목표로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 즐기는 것이다. 오로지 그 모든 과정을 자신의 삶으로써 만족하며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올림픽에서 특히 여자컬링팀이 크게 화제를 일으켰던 이유였다. 이전의 스포츠스타들과는 다르다. 어려운 성장과정을 딛고 기적처럼 힘들게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처음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과정부터가 마치 만화처럼 어이없고 터무니없다.


처음 컬링을 시작한 이유는 방과후 활동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친구를 끌어들였고, 심부름왔던 동생이 합류했고, 동생이 교실 칠판에 적어놓은 것을 보고 같은 반 친구가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2014년 국가대표선발전에서 떨어진 뒤에도 레고와 건담을 조립하면서 기분을 전환했다 말하고 있었다. 하긴 원래 동계스포츠 자체가 어느 정도 삶이 풍요로워지고 난 뒤 유희로써 즐기게 된 것들이기도 하다. 일정한 삶의 여유 없이 그저 성취만을 목적으로 도전하기에는 진입장벽이 꽤 높다. 컬링만이 아니라 선수 모두가 자신의 경기를, 자신의 삶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 그것이 여자 컬링팀에 대한 대중적 호감과 지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반대편에 정작 올림픽 은메달을 따고서도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여자 매스스타트의 김보름 선수가 있었다.


물론 이겼기 때문이다. 예선에서 8승 1패에, 준결승에서 일본을 극적으로 이기고, 마침내 스웨덴과의 결승에서 은메달을 따고 있었다. 하지만 김은정 선수를 통해 화제가 된 리드 김영미 선수의 이름처럼 대중들이 진정 관심을 가졌던 것은 경기 내내 끊임없이 소통하며 서로에 대한 신뢰를 보이는 선수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승리라는 결과도 결과지만 그 과정이 보는 이들마저 즐겁게 만들었기에 그들을 함께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경기를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은 듯한 모습을 보인 김보름 선수에 대한 비난과 그래서 정확히 대칭을 이루게 된다. 매스스타트를 위한 연습경기로 삼았든, 아니면 다른 이유로 동료선수를 망신주려는 못된 계획이었든 어찌되었거나 그들은 자신의 경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었다.


하긴 여자 컬링만이 아니다. 다른 경기에서도 굳이 금메달을 따지 못했어도 최선을 다했다면 대중은 아낌없는 박수와 함께 격려를 보내고 있었다. 금메달을 따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경기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데 대한 보답이었던 것이다. 조금 아쉽고 못미쳤어도 그러나 그것이 현실이라면 받아들일 수 있다. 한계를 딛고 넘어서고자 최선을 다하는 그 열정과 의지에서 대중이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채우는 듯한 뿌듯함마저 느끼는 것이다. 더이상 결과만이 전부는 아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 이상을 추구한다. 벌써 이 사회는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촛불혁명 역시 어쩌면 그런 연장에 있었을 것이다. 지난 9년간의 보수정권은 잠시의 반동에 지나지 않았었다. 배고팠던 시절, 간절하게 절실하게 무언가를 성취하려 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에 지나지 않았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무엇보다 안전해야 하고, 서로 소속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하고, 이제 성취를 이루었으니 스스로가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워라밸이란 말이 유행하는 현실은 그같은 사회적 성장을 말해준다. 그러니 국가대표 경기에서도 먼저 선수들 자신이 행복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대중의 기대가 달라진 것이다. 물론 그래서 이기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올림픽에 크게 관심이 없다가 어쩔 수 없이 주위에 휩쓸려 여러 경기들을 지켜보게 되었다. 내가 올림픽 등 국제경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게 되었던 이유들이 이번 올림픽에서만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경쟁팀이라도 기꺼이 응원하고, 잘했으면 거리낌없이 칭찬한다. 우리 선수와 경기하는데도 지게 되면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대중도 이제 스스로 경기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다른 곳에 자신의 존엄이, 명예가, 성취가 있었을 테니까. 올림픽을 오로지 올림픽으로써 즐기고자 한다. 그것을 처음 알게 한 것이 바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과 관련한 논란이었다. 올림픽은 올림픽, 남북관계는 남북관계, 이미 대중은 너무 쿨하다.


여러가지로 의미깊은 올림픽이었을 것이다. 지난 9년의 세월 동안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바뀌고 달라졌는가. 어떻게 성숙해 있는가. 이제는 진심으로 올림픽 그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되었지 않은가. 아시아청소년축구대회에서 4강에 오르고 열광하는 베트남 국민들을 흐뭇하게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것이 바로 진보가 아닐까. 그래서 아주 즐거웠다. 성적과는 별개로. 세상이 더 유쾌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