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아저씨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알겠다. 어쩌면 모든 아저씨들의 롤모델일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 없이 꿋꿋이 지금 여기서 버티고 살아간다는 것.
아무렇지 않다는 말의 무게다. 아무 일 없이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 아무 일도 없을 수 없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돌려 외면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며 눈감고 귀막고 거짓말을 진실처럼 읊어댄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일도 없는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나 실제 그런가.
현실을 마주하고서, 심지어 그 현실을 두 어깨로 지탱하면서, 그래서 힘겨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와중에도 그러나 여전히 아무 일도 없고 아무렇지도 않다. 자기를 지켜보는 눈들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기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자기가 그들을 지키고 서 있기 위해서. 그러니까 자기만이라도 아무렇지 않다. 아무 일도 없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기대고 매달려도 상관없다. 필사적으로 그러니까 마음놓고 자기에게 기대고 매달려도 좋다.
남자란 지키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남자의 눈은 정면이 아닌 등 뒤에 달려 있다. 자기의 등을 보여야 하는 그들을 향해 있다. 자기가 어떤 순간에도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 하는 이들이다. 때로 부모고, 때로 아내고, 때로 자식이고, 때로 형제고, 때로 친구이고, 때로 잠시의 인연으로 이어진 사이일 수도 있고. 그래서 남자는 살아간다. 현실을 딛고, 힘겨운 한 걸음을 내딛으면서, 그렇게 자신의 등뒤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남자는 답답하다. 차라리 화날 정도로 한심하고 비루하기만 하다.
어떻게든 자기가 딛고 있는 현재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부모와 자신의 형제와 자신의 친구들과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자식과 자신의 주변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어떤 위험도 굴욕도 무릅쓴다. 단, 그렇기 때문에 단 하나의 경우, 오로지 자신이 지켜야 할 그들을 위해서 그는 드물게 화를 내기도 한다. 형제의 굴욕적인 모습을 보고 마음아파 할 어머니를 위해서, 자신의 아내와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한 여자를 위해서. 온 몸을 내던져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어쩌면 별 것 아닌 인연을 위해서도 그는 싸울 수 있다. 그가 앞으로 나가고자 결심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무엇도 아닌 가족이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과연 이지안(이지은 분)은 박동훈을 남자로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그보다는 어려서 돌아간 아버지의 대신은 아니었을까. 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에서 유독 박동훈의 뒷모습이 자주 나온다. 고단한 현실을 짊어진 어깨가 밤의 어둠과 함께 무겁게 짓눌려 있는 듯하다. 자신이 지탱하고 있는 그런 현실의 무게가 이지안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크기까지 가늠하게 한다. 이지안의 절망과 불행과 공포까지 모두 끌어안는다. 심지어 야단까지 친다. 그렇게 살지 말라. 그렇게 살아서 안된다. 어쩌면 지금껏 아무도 이지안에게 그렇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언젠가 아무때고 지금의 인연이 끝났어도 그들의 사이가 끝난 것은 아니다.
대단히 특별한 무언가를 요구한 것이 아니다. 그러겠노라 선언한 것도 아니다. 그냥 평범한 것이다. 그동안 자기가 베푼 것이 있으니 기꺼이 그에 대한 감사를 받겠다. 그동안 알아온 시간도 있고 주고받은 인연도 있으니 그 만큼 관계를 계속 이어가겠다. 반드시 남녀사이로만 만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직장상사와 부하사이로만 있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저 같은 동네 살고, 부모끼리 알고, 학교도 같은 탓에 지금도 형동생하며 지내는 조기축구회 친구들처럼 그렇게 서로 아는 사이로 언제고 만나면 반가워하며 지내겠다. 그런데 가만 들으면 알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박동훈의 삶은 항상 그의 표정만큼이나 무겁고 고단하기만 하다.
어쩌면 겸덕(박해준 분)은 박동훈과 정반대편에 서 있는 안티테제적 존재였는지도 모르겠다. 겸덕이 출가를 통해 극복하려 했던 속세의 인연 그 자체다. 윤회의 업 그 자체다. 그래서 한 편으로 박동훈 자신도 세상은 지옥이라며 벌받으러 태어난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업과 모든 인연을 회피하지 않고 온전히 짊어지고 가는 것이야 말로 자기가 지은 죄를 속죄하는 길이다. 박동훈의 구원은 그래서 속세에 있고 겸덕의 구원은 그래서 속세를 벗어난 도량에 있다. 그러나 인연이 스스로 끊으려 한다고 끊어진다면 그것을 굳이 인연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출가한 겸덕보다 더 수도자적 삶을 사는 것이 박동훈 아니었을까.
저렇게는 못산다. 아니 실제 저런 삶을 살아온 많은 남자들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아버지라 부르는 이들이다. 자식에게도 그저 등만을 보이며 살았던 수많은 이름없는 이들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도 모든 남자는 그런 식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도저히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순간에도 필사적으로 버티고 일어서서 파이팅 한 마디와 함께 앞으로 한 걸음을 떼어 놓는다. 그런 박동훈이 비명처럼 고함지르고 벽을 주먹으로 내리칠 때 그래서 어떤 울음보다도 더 서럽게 느껴졌다. 그래도 멋지지 않은가. 화나도록 안쓰럽고 불쌍할 정도로 필사적이지만 그래서 남자란 멋지지 않은가.
제목을 잘 지었다. 아버지가 없는 젊다기보다는 세상경험만 많은 한 어린 여성의 눈에 보이는 누가 봐도 어른인 남자의 모습이었을 터다. 그에 비하면 다른 의미로 도준영(김영민 분)은 박동훈의 안티테제로써 어른이 되지 못한 - 스스로 책임지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본능적인 탐욕으로 끊임없이 다른 것을 탐내고 빼앗으려 할 뿐 무엇도 지키지 못하고 지키려 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땅을 딛고 서 있는 박동훈에 비해 도준영은 화려한 건물을 이고 서있는 듯 보인다.
내가 잘못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본 드라마에서 이지안은 그렇게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었다. 그보다는 철저히 아저씨 박동훈이 드라마의 중심에서 드라마를 지탱하며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아저씨'다. 어쩌면 모든 아저씨들의 로망, 되고자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한 오래전 아버지의 뒷모습인지 모른다. 철저히 남자의 드라마다. 그것도 어느새 꺾여가는 아저씨들의 드라마다. 아마 모든 아저씨들이 박동훈처럼은 될 수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모든 아저씨들은 박동훈이었을 터다.
때로 꺾이고, 때로 주저앉고, 그래서 때로 울며 넋두리도 해 보지만, 그러나 여전히 등뒤에 있는 누군가를 의식할 때 남자들은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다. 아저씨들은 다시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의 고단함조차 두려워않고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그런 강함과 용기다. 세상의 모든 아저씨들을 위해서. 파이팅.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라이브 - 과도한 경찰PPL의 부조화... (0) | 2018.04.30 |
---|---|
라이브 - 경찰의 억울함과 동의할 수 없는 그들의 업보 (0) | 2018.04.29 |
라이브 - 한정오의 과거와 경찰의 낙인, 지랄맞은 현실들에 대해 (0) | 2018.04.23 |
라이브 - 경찰의 사명과 인간의 생로병사 (0) | 2018.04.22 |
키스 먼저 할까요 - 그래도... 사랑하니까! (0) | 2018.04.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