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 그들의 길이 자꾸만 겹치는 이유

까칠부 2018. 9. 29. 23:58

과연 조국이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나 전쟁 도중 귀순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헌신적으로 조선을 위해 싸웠던 김충선에게 조국이 어디냐 묻는다면 무엇이라 답할까?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외국인들이 있었고 남의 나라 조선의 근대화와 광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이들도 있었다. 단지 인종이 다르고 출신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남이어야만 하는 것일까.

 

유진 초이는 미국인이다. 구동매도 히나도 모두 일본인들이다. 어차피 출신이 비천하다는 이유로 사람취급도 못받던 그들에게 새삼 조선에 대한 염려나 애정이 있을 리 없었다. 유진은 냉정했고 구동매는 잔인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도 조선을 위해 싸워야 하는 이유는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지키고픈 사람들이 있었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도 아무렇지 않게 내놓을 수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저없이 내놓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조선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려던 고애신의 모습과도 닮았다. 그래서 행랑아범과 함안댁과 노인들도 기꺼이 웃으며 죽을 길을 맡아 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이야 말로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하고 중하다.

 

그깟 조선. 이까짓 조선.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이 있고 고통에 신음하는 사람이 있다. 아직 어린 아이조차 무심히 총으로 쏘아 죽일 수 있는 일본군에 비해 그들의 아픔을, 슬픔을, 절망을 함께 느끼며 분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데 막연한 울분에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이들이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모든 인간에 대해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에게까지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가. 일본인들이 처음부터 조선사람들을 자신들과 같은 인간으로 보았다면 의병같은 것은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선인이고 한민족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으로 산으로 자신의 생업마저 뒤로 하고 어쩌면 죽을 지 모르는 길로 모여든다. 말마따나 이대로는 밥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니까 무엇이 조국인가. 무엇이 민족인가. 어째서 그렇게까지 목숨까지 내걸고 싸우려 하는가. 뻔히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처럼 즐겁게 웃을 수 있는가. 무엇이 이 땅을, 이 땅의 사람들을 있게 했고, 지금껏 그것들을 지켜오고 있었는가. 우리라 여기는 모두의 뿌리이자 정체성이다. 비록 실패했고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지만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그래서 묻는드. 어째서 한반도에 사는 지금 우리들은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부르는가. 미국인인 유진도, 일본인인 구동매와 히나도, 비천한 신분의 노비도, 백정도, 고귀한 명문의 애기씨도 없이 그래서 그들은 조선인이다. 우리는 한국인이다.

 

패배한 역사지만 주눅들지 않는다. 실패한 역사지만 도망치지도 외면하지도 않는더. 정면으로 직시한다. 어떻게 그 절망적인 순간들을 싸우고 견뎌 왔는가.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고자 한 이들이 있었다. 그 정신이, 그 의지가 이어져 마침내 일본의 패배와 함께 한반도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스스로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면 우린 실패한 것이 아니다. 패배한 것이 아니다. 역사의 주인은 왕도 조정의 대신도 아닌 우리들 자신이다. 그런 수많은 우리들의 초상을 보여준다.

 

이제는 유진과 고애신의 애절한 사랑마저 사소해 보인다. 히나를 먼저 떠나보낸 구동매처럼 김희성도 어떤 결심을 굳힌 것 같다. 전혀 그럴 것처럼 보이지 않던 이들마저 분노와 함께 모여든다. 전혀 그럴 의도가 없던 유진의 길이 왠지 의병의 길과 겹치는 이유다. 오히려 지금이기에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고 왔고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작가의 내공일까? 사소하고 평범한 일상의 대화에 보다 깊고 방대한 의미를 담아낸다. 그 의미를 느끼며 한 편으로 전률한다. 과연 행랑아범과 함안댁의 죽음으오 끝일까? 하루를 다시 안달하며 기다리는 이유다. 깊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