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기에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른다. 인간이 무오류일 수는 없다. 그런 건 처음부터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전문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저 아인슈타인조차 양자역학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전혀 잘못 이해해서 엉뚱한 논리를 펼치다 크게 망신을 당한 적 있다.
아인슈타인만이 아니다. 한 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논문들 가운데 정작 쓸모있는 내용이 담긴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대개는 무시당하고, 그나마 주목을 끌만한 것들도 이내 다른 학자들에 의해 그 오류들을 비판받고 반박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것이 또한 과학이 발전해가는 과정이다. 수없이 실수와 잘못을 반복하며 그것들을 비판받고 반박당하는 가운데 보다 완전한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가게 된다. 서구의 과학은 그같은 두려움없는 오류와 거침없는 비판 가운데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흥망사'는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던 로마사의 대표적인 저작이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료와 유물들을 통해 밝혀낸 현대의 로마사는 당대 최고의 저작이었던 이 책을 단지 이전 시대의 고전으로만 남게 만들었다. 하긴 같은 이유로 유시민 작가도 자신의 베스트셀러였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자신의 의지로 절판시켰을 것이다. 시간의 장벽 너머로 지난 과거를 유추해가는 과정은 인간의 인지를 넘어서 우주의 법칙을 찾아내려는 과학 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과정일 것이다. 더구나 주류에서 벗어난 민간의 소소한 문화나 풍습에 대한 연구는 한계까 매우 명확하다. 도대체 수백년 전 사람들은 무엇을 어떻게 먹으며 살았을까. 지금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어떤 유래로 이런 이름과 모습을 갖추게 되었을까.
모르면 말하지 말라. 틀린 내용이면 아예 말도 꺼내지 말라. 그럴 것이면 지금 있는 블로그며 카페, 사이트 가운데 99%는 문닫아야 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자신들도 과거 자기가 인터넷에 올린 글들을 보면서 앞으로 절대 잘난 척 공개된 자리에서 글쓰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고보니 '알쓸신잡3'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나왔다. 워낙 말 한 마디에 죽고 살고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으니까. 말 한 마디에 사람이 목숨이 오가고 심지어 구족이 몰살되는 경우마저도 있었다. 그러니 아예 처음부터 확신이 서지 않으면 말 자체를 꺼내지 말라. 하지만 말했듯 학술이란, 인간의 지성이란 그런 오류와 모순들을 딛고서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틀린 내용이 있으면 반박한다.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비판한다. 그런 과정에서 미처 몰랐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보다 더 진실에 가깝게 다가간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 전혀 사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한다고 마냥 부정만 하지는 않는다. 사실 지식인에게 오류란 그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진중권도 언젠가 말한 적 있을 것이다. 전혀 확신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도 지식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한 자신의 견해를 대중들에 밝힐 수밖에 없다. 하나의 규준이 된다. 지지하고 따르거나, 아니면 반박하며 비판하거나. 그 과정에서 대중은 자신이 판단할 근거를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진실을 위한 불쏘시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라고 그들에게 그만한 명성과 지위와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틀릴 수 있다는 것은 지식인이기에 누리는 특권일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대중들을 그처럼 틀릴 수 있는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만큼 다양한 많은 자료들을 접할 수 있고, 그렇게 알아낸 틀린 사실들조차 대중들에 알릴 기회도 가질 수 있다. 어차피 나같은 이름없는 개인이야 틀려도 틀린 사실조차 대부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아예 어떤 사실에 대해 알고 싶어도 시간도 돈도 그를 위해 쓸 노력도 부족해서 그냥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누군가 그에 대해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발표했을 때 그에 대해 판단할 수는 있다. 그래서 틀렸다. 무엇이 잘못인가.
그래서 우스운 것이다. 이제 한 개인에 대한 비판은 거대한 물살이 되어 가속까지 붙기 시작했다. 전혀 비판할만한 내용이 아닌 것들마저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의도적으로 오독되고 오독된 내용들이 공유되며 아예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비판받을만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들까지 하나로 어우러여 하나의 인격을 정의한다. 그리고 마치 스포츠경기처럼 누가 더 많이 더 지독하게 황교익을 비판하고 모욕하는가를 경쟁하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정의이고 자신이라는 인격의 가치이기라도 한 듯. 그에 대한 증명이기라도 한 듯.
그렇다고 황교익에게도 아주 잘못은 없는가. 지식인이기에 틀릴 수 있는 만큼 또한 지식인이기에 그에 대한 비판과 비난 또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지식인으로써 가지는 공적인 영향력 만큼이나 공적인 대상으로써 소비하려는 대중의 요구에도 기꺼이 응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대중은 하이에나와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조금만 틈을 보이면 상처를 비집고 피투성이로 만들어 자신들의 위치로 끌어내리려 한다. 자신들의 아래 두고 짓밟으려 한다. 대상이 고귀할수록. 영예로울수록. 아름다울수록. 그래서 더욱 대중과 다른 존재에 대해 완전무결함을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끌어내려 가장 비천하고 추악한 자로서 모욕하고 짓밟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자신에 대한 부당한 비난들마저 아예 무시한 채 넘어갔다면 저리 기회를 노리고 덤벼드는 수많은 집단을 보게 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블로그에서 댓글접대를 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 개인이 여럿을 동시에 상대하기란 어렵다. 자신도 모르는 수많은 오류들을 그것도 셀 수도 없는 다수의 개인들이 일일이 찾아서 들추며 공격해 온다. 자신이 다 가릴 수 없는 허점과 약점들이 저들에 노출된 채 공격의 대상이 된다. 그마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자기가 틀렸다. 자기가 잘못 알았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이러이러한 반박에 의해 이런 식으로 결론난 것들도 있다. 아니 그마저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최선이었을 것이란 것이다. 대부분 블로그나, 카페, 사이트, 혹은 개인들이 여전히 뻔뻔하게 수많은 오류들에도 오히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더 신랄하게 잔인하게 비판하며 활동을 이어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오류들에 대해 절대 사과하지 않는다. 반성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들이 잘못 알고 비판한 대상에게도 작지 않은 잘못이 있었다. 그러니 자신들에게는 어떤 실수도 잘못도 없었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과 비판하고 싶은 부분과 반박하고 싶은 부분과 그럼에도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은 부분들이 있다. 그렇게 하는 말마다 모두 틀렸고 오류투성이인데 전문가로 인정받고 왕성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을 리 없다. 비판하는 대중이 바보가 아니듯 그를 전문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대중 역시 바보가 아니다. 아니 둘 다 바보다. 그것까지 인정하면 된다. 인간은 오류투성이이며 그러므로 언제든 틀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할 수 있고 반박할 수 있으며 그런 과정에서 오류들을 바로잡을수도 있다.
말한 것들 가운데 틀린 것이 있으므로 아예 말하지 못하게 한다. 아예 매장해서 활동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 그에 대해 동의하지 않거나 심지어 비판적인 이들에 대해서는 정의를 앞세워 공격하기도 한다. 늘 보아오던 모습들이기는 하다. 황교익의 대응이 사안을 키운 측면도 있다. 타블로의 예에서 보았듯 이미 하나의 대세가 된 시점에 어떤 변명도 반론도 오히려 그마저 빌미가 될 뿐이다. 싸우려 해서는 안된다. 그마저 인간이기에 가지는 오류이며 결함이다. 나로서는 결함에 더 가깝다 보는 편이지만.
누구나 틀릴 수 있다. 누구도 항상 옳을 수는 없다. 틀린 것들만 모으면 아인슈타인도 세상에 다시 없을 멍청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어쩔 수 없이 되도 않는 헛소리나 지껄이는 무지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황교익이 그들과 같은 급이라는 것이 아니라 굳이 그렇게까지 사소한 과거의 잘못들까지 들춰가며, 의도적인 오독까지 해가며 정의인 양 몰아세워야 할 이유가 있는가 묻고 싶은 것이다. 스스로 그것을 진정 정의라 생각하고 있는 것인가. 그러면 누구도 대중 앞에 나서서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일까. 단지 대중에 아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중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가 대단함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이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저들은 항상 다수로 몰려다니며 행동하는 것이다. 꼭 누군가를 비판할 때도 자기의 이름이 아닌 대중의 이름 뒤에 숨어 비판한다. 비판하는 방식도 내가 이렇게 생각하니 당신들도 그를 비판해 달라. 내가 비판하고 그 비판에 대해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닌 모두가 책임을 나눠 져야만 한다. 물론 그래서 대중이다. 자기 이름을 걸고 자기 책임 아래 주장을 펴는 사람은 이미 대중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대중의 이름으로 한 사람을 꺾어야겠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황교익이 됐다. 언제나 그동안 다른 이들에게도 그래왔던 것처럼. 그리고 그 이면에 그들의 불쾌한 의도를 숨긴다. 늘 그래왔던 그대로.
그냥 틀렸겠거니 여긴다. 이건 전혀 잘못 알았겠거니 여기고 만다. 누군가 비판하면 그 논리와 근거를 살펴서 자신의 판단을 돕는다. 한 권의 책이 진리가 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주장이 진실이 될 수는 더더욱 없다.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꿈을 꾸거나 아니면 몽상에 기대어 자기합리화를 하거나. 그리 좋게 보이지만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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