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면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원래 경상도 경주 분이셨다.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태어난 곳은 모르겠지만 아주 어려서 고아가 된 할아버지를 종가에서 거두어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뒤 혼인까지 시켜주었다 했었다. 그렇게 가정을 꾸리고 난 뒤 독립하겠다고 경주를 떠나서 이사한 곳이 함경도 함흥이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원래 함흥분이시다. 아버지 형제분들이 모두 해방되기 전 함경도에서 태어나셨다.
그래서 흥미로운 것이 원래 나고 자란 곳이 경주였으니 38선이 그어지고 남북으로 분단되었을 당시 고향을 찾으려 했다면 다시 경주로 돌아가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무려 수십년이나 지나서 큰아버지가 다시 경주의 종가를 찾았을 때 아직도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어른들이 남아계셨다. 그래서 별 어려움없이 종가에서 다시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했었다. 나 역시 그때 족보에 올리며 돌림자를 써서 새로 지은 이름이 따로 있다. 그런데 정작 할아버지는 경주로 돌아가기보다 그나마 함경도에 가까운 강릉에 머물기를 선택하셨었다. 원래는 완전 산속이었는데 얼마전 가보니 주위에 큰 도로가 뚫리면서 완전 천지개벽 수준으로 바뀌어 있었다. 작은 아버지 살던 밤나무 많던 숲도 아파트 단지가 되어 있었다. 어째서? 왜?
아마 북쪽에는 큰 고모 한 분만 남아계셨을 것이다. 그나마 큰 고모의 자식들은 남쪽으로 내려와서 제법 왕래도 하고 지냈었다. 북쪽에 두고 온 재산이 꽤 되었다고 하니 그것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돌아가실 때까지 그린 고향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경주가 아닌 가정을 이루고 이주해 지냈던 함경도 함흥이었다. 아버지에게도 고향은 강원도 강릉이었지 함흥은 아니었었다. 고향이란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가? 유럽의 어느 요양원의 경우처럼 고향이란 단지 돌아갈 자신의 집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정확히 기억이 머무는 장소다. 자기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들이 머물러 있는 장소다. 할아버지에게도 남의 집 살이를 하던 경주보다는 가장으로서 가족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함흥이 더 기억에 강하게 남았을지 모르겠다. 그곳에서라면 다시 행복할 수 있다. 다시 더 안전하게 평안하게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다. 삶이 고단할수록. 현실이 고달플수록. 그래서 고향에만 돌아가면 편안히 쉴 수 있을 지 모른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고향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일지 모르겠다. 현대인이 서글픈 것은 그런 돌아갈 고향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현실 밖의 어딘가 한적하고 풍광 좋은 곳을 그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아마 오디션 '위대한 탄생'에서 김태원이 그리 말했었을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맞다. 그래서 인간이 지금 지구표면 거의 전체에 퍼져 있는 것이다. 다른 동물은 굳이 무리에서 밀려나지 않는 이상 서식지에서 멀리 벗어나 이동하거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제 발로, 굳이 없는 기술로 배까지 만들어가며 막막한 바다를 건너 작은 섬들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 모험이 끝나고 현실에 안주하게 되면 자기가 떠나온 그곳을 그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위험했던 만큼. 고달팠던 만큼. 떠나는 것도 본능이고 돌아가는 것도 본능이다. 그 사이 어디쯤엔가 인간은 현재에 머물며 살아간다.
하필 강원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온 때문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한 걸음이라도 먼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38선 바로 밑 강원도에 모여 살았었다. 어째서 사람은 그토록 고향을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먼 바다를 거슬러 돌아오는 연어들처럼. 아마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연어가 돌아오는 지역일 것이다. 그리고 과연 내가 돌아갈 고향은 어디인가.
갈 수 있지만 가지 않는 고향과, 굳이 가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돌아갈 수 없는 그곳에 대한 마음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고향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 그냥 그것만 기억에 남았다. 하루가 지나고 무언가 써보려 하니 딱 그 이야기들만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것은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곳을 찾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서글픔이기도 했을까.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을 이야기다. 아주 오랜. 태어나기 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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