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애 박사의 말처럼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부산은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래서 동래부 아래 부산진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헌이 있으면 그 아래 부산진첨사 정발이 있었던 식이다. 그러면 언제부터 부산이 커지기 시작했는가. 바로 그것이 한국 현대사의 아픈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모두 헤집어 사람이 살도록 만들어 놓았다. 가파른 산비탈도, 죽은 이들을 위한 무덤자리도 모두 산 사람을 위한 집터로 바뀌고 있었다. 그렇게 사람이 모여들고 그 사람들이 부산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으며 자연스럽게 부산이라는 도시도 커지게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미국과 일본으로 직접 통할 수 있는 바닷길이 필요했던 대한민국의 현실이 부산을 최대의 항구도시로 일구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부산은 어쩌면 서울보다도 더 유행의 첨단을 걷는 도시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조금 예민하게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녀석들은 돈만 있으면 바로 부산으로 가서 뭐든 사들고 오고 했었으니까.
그런 삶의 현장들을 더듬어 간다. 전쟁의 참혹함에서 시작해서 그 처참한 현실 위에서도 삶을 이어가야 했던 인간의 강인함에 대해서. 그렇게 생명을 이어가고 그렇게 새로운 문명을 일구어낸다. 그러고보면 세계의 수많은 문명들이 그런 어쩌면 이주민들에 의해 일구어졌을 것이다. 갑자기 북아프리카 일대가 사막이 되면서 몰려든 수많은 유목민들이 나일강유역에서 이집트 문명을 일구어냈듯. 이 또한 우리의 역사다. 전쟁과 산업화라는 낯설면서 낯설지 않은 불과 얼마전의 시간들인 것이다.
사실 서울에도 비슷한 동네들이 많았었다. 특히 봉천동이 그랬다. 오래전 봉천동에도 공동묘지가 있었단다. 봉천동 토박이인 어느 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전쟁이 끝나고 너도나도 그나마 서울로 몰려들면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 움막을 짓고 아무렇게나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딱 골목도 예전 봉천동의 그것과 닮았다. 다닥다닥 붙은 좁은 집들과 가파른 계단이 꼭 그것을 연상케 한다. 원래 예전 달동네 골목들이 거의 그랬었다. 아무 계획없이 그저 삶을 향한 강렬한 열망만으로 그렇게 아무렇게나 얼기설기 지어지고 있었다.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전혀 의도하지 않은 곳에 이르게 된다. 어려서 나도 동네 골목길을 일일이 헤매고 돌아다니는 것을 놀이로 여기기도 했었던 것 같은데. 물론 지금 서울에는 예전 있었던 그런 골목들이 거의 사라지고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부산의 골목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그 시절 나 살던 골목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과연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이 단지 북한군의 탱크 때문에 그리 지리멸렬 궤주하고 있었는가면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전쟁이 발발하고도 1사단과 6사단, 8사단이 성공적으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거나 심지어 격퇴하고 있었고, 아예 북쪽에서 패주한 병력들만을 모아 만든 한강방어선 역시 거의 모든 물자와 장비를 버리고 온 상태에서도 무려 6일이나 전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놀러가느라 연락두절된 참모총장 채병덕과 일요일이라고 아예 전화선을 뽑아 놓은 신성모 등 지휘라인의 태만이었다. 심지어 이승만은 조봉암 등 국회의원들이 채병덕과 신성모 등을 상대로 전황을 묻고 결의안을 내려는 상황에 먼저 경무대를 비우고 도망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참모총장 채병덕이 그나마 남에서부터 올라온 병력들을 축차투입하며 무의미하게 소모한 결과 서울의 북쪽은 텅 비게 되었고, 대통령까지 도망친 상태에서 지휘체계란 사실상 사라진 것이나 같았다. 당시 대통령의 무책임한 도주로 서울에 남아 있다 북으로 납치된 명사들이 도대체 얼마이며, 단지 납치되었을 뿐인데 연좌로 고생한 그 가족은 또 얼마였을까.
탱크에 책임을 묻는 것은 오히려 T-34 입장에서 너무 억울할 일이다. 물론 적절한 대전차장비 없이 탱크의 공격을 막아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강방어선에서 고작 6일을 지연시켰을 뿐인데도 한국군은 후방에서 재집결하여 정비할 수 있었고 일본에 주둔중이던 미군도 한국군을 돕기 위해 대한해협을 건널 수 있었다. 무엇보다 유엔에서는 미국의 주도 아래 침략군인 북한으로부터 남한을 구하기 위한 유엔군의 창설이 결의되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면 반드시 이겨야만 잘 싸운 것은 아니란 것이다. 어차피 질 싸움이라면 잘 지는 것도 잘 싸우는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충분한 시간을 벌고 한강 이북의 물자와 인력을 안전하게 한강 이남으로 옮긴 채 미국의 도움을 받아 이후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면 그렇게 허무하게 낙동강까지 밀리고 있었을까? 참고로 당시 북한군의 남침사실을 처음 경고한 것이 정보장교이던 박정희였고, 남침사실을 가장 먼저 인지하고 보고했던 것은 얼마전 세상을 떠난 김종필이었었다. 나름 군인으로서 유능했던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오랜만에 듣는 김성환 화백의 이름과 처참했던 당시의 상황과 그럼에도 딛고 일어나 대한민국 제 2의 도시를 일구어낸 인간의 강인함과, 무엇보다 떡볶이 하나에도 칸트의 정언명령이 나오고 베버의 공리주의가 나오는 지적허영이 시간을 그만 건너뛰어 버린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건강한 삶인데. 헌책방은 나 역시 무척 좋아하는 공간이다. 전혀 의외의 책을 전혀 의외의 시간, 의외의 장소에서 만날 수 있다. 수다떨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도 수다가 길었다. 더 할 말이 많은데. 시간은 항상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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