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영화 '웨스트월드'를 떠올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색지대'라는 제목으로 TV 에서 방영된 바 있었다. 표정없이 오로지 주인공만을 집요하게 뒤쫓던 총잡이 안드로이드의 모습은 그야말로 터미네이터의 원형이라 할 수 있었다. 죽일 수도 도망칠 수도 없는 압도적인 살인자 건슬링거의 모습은 어린 마음에도 너무나 큰 충격이었고 공포였다. 오죽하면 율 브리너가 진짜 안드로이드는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까지 했을까.
드라마속 게임 그라나다는 영화 웨스트월드의 테마파크와 닮았다. 로마와 중세, 서부개척기의 일상을 실제처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안드로이드의 역할을 게임 그라나다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이 맡는다. 안드로이드를 상대로 아무 죄책감 없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었던 영화속 테마파크와 같이 게임 그라나다에서도 주인공은 아무 거리낌없이 컴퓨터 그래픽을 상대로 자신의 폭력적 충동과 욕망을 드러낸다. 마음껏 베고 찌르고 죽여도 된다. 오히려 더 많이 죽일수록 보상을 받게 된다. 그래서 오랫동안 욕망해 온 대로 차형석도 죽일 수 있었다. 어차피 진짜 칼도 아니고 진짜 죽이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테마파크의 안드로이드들에 자아가 생기며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처럼 게임으로 인한 것인지 차형석이 죽은 시체로 발견되면서 게임캐릭터가 된 차형석이 유진우를 뒤쫓기 시작한다. 죽여도 다시 살아나서 차형석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웨스트월드에서 주인공을 쫓던 안드로이드 건슬링거의 모습 그대로다. 게임캐릭터인 만큼 아무 표정 없이, 자신을 죽인 유진우에 대한 어떤 증오도 적개심도 드러내지 않으며 그저 기계처럼 찾아와 칼을 휘두른다. 그래도 사람일 때는 유진우의 말에 휘둘리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에 흔들리기도 하는데 게임캐릭터는 전혀 그런 것도 없다. 게임에 접속하는 동안 유진우는 계속해서 그 공격을 받아야만 한다. 도망칠수도 숨을수도 없다. 게임캐릭터는 게임 안 어느 곳에나 있다.
문제는 웨스트월드의 안드로이드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아가 생기며 인간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처럼 알 수 없는 이유로 유진우 역시 게임의 접속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기타소리일 것이다. 드라마의 제목인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기타연주가 들리기 시작하면 유진우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어느새 그는 게임에 접속해 있었다. 게임속에서 게임캐릭터가 된 차형석과 마주하고 있었다. 차형석이 자신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이해를 벗어난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여기서 또 하나 날줄이 더해진다. 게임 '그라나다'가 씨줄이면 개발자인 정세주와 연관된 듯한 또다른 인물, 혹은 세력은 날줄이 된다. 과연 차형석은 게임 때문에 죽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를 가진 누군가가 그를 살해한 것일까? 유진우와는 달리 차형석은 게임의 권리를 가지기 위해 정세주의 배후에 있는 다른 인물과 접촉하고 있었다. 그에게 뒤통수를 맞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정세주를 쫓던 것은 과연 게임속 캐릭터들이었는가. 아니면 실제의 누군가들이었을까. 그러니까 유진우의 말처럼 지금 이 모든 상황이 누군가의 의도된 조작이나 농간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며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그들을 잡을 수 있을까.
아직 시작도 않은 것 같다.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겨우 첫걸음도 떼어 놓지 않은 것 같다. 어째서인지? 왜 이렇게 된 것인지? 무엇보다 앞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인지. 차형석은 시작이다. 그의 죽음마저 퍼즐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아직 전혀 상관없이 보이는 정희주는 그 과정에서 또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100억에 호스텔을 팔고서 그녀는 어느때보다 행복하다.
여기서 이대로 죽고 끝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만한 존재감이 있다. 그만큼 인상이 강했다. 그저 스쳐지나간 오랜 악연 하나로 끝내기에는 캐릭터나 배우나 모두 너무 아깝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무심히 나타나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는 그 무기질적인 모습이 드라마에 단단한 얼개를 더한다. 그를 쫓는다. 그에게 쫓는다. 과연 어디까지 몰리고 또 몰아붙일 수 있을까. 또 하나 긴장요소이고 재미다. 흥미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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