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사람들이 게임에 빠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단한 현실로부터 잠시나마 도피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게임은 모든 유저를 포식자로 만들어준다. 사냥꾼으로 지배자로 때로 절대자로 만들어준다.
태초의 인간은 사냥꾼이었다. 야생의 짐승을 쫓아 사냥하면 가장 맛나고 기름진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도 오지의 원시부족 가운데는 하루의 대부분을 사냥감을 쫓아 숲을 헤매며 다니는 이들이 남아 있다. 사냥감을 쫓는 쾌감과 사냥감을 잡은 뒤 얻는 성취감을 게임을 통해 고스란히 느낀다. 그것은 아직도 인간의 유전자에 남아 있는 본능의 영역인 것이다.
따지고 헤아리고 살펴야 하는 일들이 많은 복잡한 현실과 달리 게임 속에서는 그래서 모든 유저가 사냥꾼이 되고 지배자가 되어 오롯한 쾌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더구나 게임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스펙까지 높으면 말할 것도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해도 된다. 깽판이든 꼬장이든 난장이든. 정희주로부터 거부의 말을 듣고 바로 자기가 닥사로 레벨을 올리던 폐교를 찾은 것도 그곳에서 만큼은 다치거나 위험해지는 일 없이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울한 감정도 답답한 마음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다.
확실히 현실의 인간관계란 게임에 비하면 너무 복잡하고 변수가 많다. 게임에서는 레벨만 높으면 된다. 스펙 높고 아이템 좋고 공략만 확실히 알면 헤매거나 실수할 일이 적다. 유진우 정도 레벨이 되면 어지간해서 맞아도 죽거나 하지 않는다. 사실 이것도 오류인 게 고렙이 저렙 사냥터에 가면 꼬장이나 부리지 레벨을 올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게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의도적으로 자기 레벨에 맞는 사냥터와 사냥감을 찾도록 그리 설계하는 경우가 많다. 레벨에 맞는 사냥감을 찾아야 지속적이 게임의 긴장과 재미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처럼 레벨차이가 많이 나는 잡몹들만 열심히 잡는다고 무슨 긴장이 되겠으며 긴장이 없는데 성취감은 있을 것인가. 레벨 오르고 스펙 오르고 아이템도 좋아진 만큼 그에 걸맞는 상대를 찾아서 그를 확인하는 과정은 필수인 것이다. 그래야 보람도 성취감도 있다. 아니면 유진우의 경우 그냥 잡몹을 학살하는 그 자체에서 쾌감을 느끼는 경우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해서 결혼한 첫아내는 친구와 바람나서 이혼하고, 홧김에 결혼한 두번째 아내는 자기를 핑계로 외국에서 바람을 피고, 믿고 의지하던 선배와 지도교수는 회사에서 자기를 내몰 계획을 세우고 있다. 믿어달라 한다고 다 믿어주는 것도 아니고, 이해해달라 해봐야 자기 입장과 필요에 따를 뿐이다. 그래서 가장 쉬운 방법을 안다. 명령한다. 마찬가지로 저쪽에서도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한다. 명령할 수 없게 한다. 처음부터 차형석의 죽음과 관련해서 오해를 풀지 않고 넘어간 것이 문제였을지 모른다. 그때부터였거나 아니면 원래 그 정도 관계였거나. 온전히 믿지도 않고 온전히 이해하려고도 않는다. 그런 상황에 믿을 건 현실보다 더 진짜같은 가짜였을 것이다. 정희주에 대한 감정도 단지 도피하고 싶은 욕망이 정희주를 대상으로서 이상화시킨 것은 아닐까. 정희주에게 유진우가 고단하고 막막하기만 한 현실에 100억이라는 구원을 베푼 꿈속의 인물인 것처럼.
그러니까 결국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게 된다. 실제와 게임이 서로 엇갈리게 된다. 어디서부터 진짜고 어디서부터 가짜인지. 그라나다란 그런 게임이다. 현실을 환상으로 만들고 환상을 현실로 만든다. 그래서 마법이다. 드라마를 보는 이유와 같다. 실제의 인물이 나와서 연기하지만 저것은 가짜다. 실재하지 않는 허구다. 그러나 실제보다 더 실제로 믿고 싶은 허구다. 정세주의 단서를 찾는다. 현실에서 사라진 정세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다. 이제는 공주님을 위해 모험을 떠나야 할 때다. 이혼으로 한 몫을 노리는 두번째 아내와 자신을 몰아내려는 회사관계자들을 뒤로 하고 어쩌면 진짜를 찾아 게임으로 모험을 떠난다. 유진우에게 현실은 게임일까? 아니면 게임이 현실일까?
게임의 묘사에 대해서는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드라마니까. 게임은 단지 소재에 지나지 않으니까.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혹은 둘러싼 군상들의 이야기를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매력적인 남녀간에 애절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까지. 운명은 어떻게 해도 이어진다. 멀어지려 해도 끊어내려 해도 어떻게든 절대 이어지고 만다. 그런 운명을 믿고 싶을 것이다. 헤어지고 멀리 돌아오더라도 결국은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될 것이다.
결국 게임 그라나다에는 제이원에서도 알지 못하는 더 강력한 접근권한이 소스코드에 심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 차형석의 환상도 그 마스터 영역에서의 오류로 인해 나타나게 된 것인지 모른다. 그 비밀을 오로지 최초개발자인 정세주만이 알고 있다. 이 모든 문제의 답도 정세주에게 있다. 게임이 현실이고 현실이 게임이다. 그는 마법사다. 게임에서 그는 절대자다. 질문의 답을 찾는 여행이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다. 진실을 찾는 모험이다. 유진우가 찾게 될 진실은 어떤 것일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절대 유진우처럼 게임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폐인과 민폐의 전형을 보여준다. 저렇게는 하지 말아야겠다. 돈도 시간 권한도 부족해서 절대 그럴리 없지만 말이다. 최악이다. 게임유저로서. 저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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