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닥터 프리즈너 - 의학드라마 뒤집기, 병을 만들다

까칠부 2019. 4. 4. 12:03

뭔가 그려지는 것이 있다. JH철강 회장의 아들인 김석우를 희귀병인 윌슨병으로 인한 양극성장애로 형집행정지를 받을 수 있게 꾸미려 한다. 그런데 이 윌슨 병이 고약한 병이다. 하긴 징역형을 선고받은 범죄자의 형집행을 중단해야 하는데 가벼운 병일 리 없다. 그로 인한 양극성장애 또한 타인에게 위해를 가자히 못하니 스스로 뼈까지 부러뜨리며 자해까지 한다. 그 자해를 꾸미기 위해 나이제는 아예 대놓고 김석우를 폭행하기까지 한다. 이해가 되는가. 형집행정지를 받기 위해 없는 병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해를 꾸미기 위해 폭행을 당해야 했던 것처럼 건강을 심각하게 망가뜨려야 할 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복마전이다. 욕망과 욕망이 만들어낸 아수라장이다.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을 면하고 싶은 가진 자들과 그들의 욕망을 이용하려는 또다른 가진 자가 지옥을 만들어낸다. 사람의 목숨을 마음대로 주무르며 마치 왕처럼 신처럼 모두의 위에 군림하면서 더 큰 욕망을 위해 다른 욕망과 거래하려 한다. 사람이 사람이 아니고 정의가 정의가 아니고 법조차 의미를 잃어 버린다. 그런 한가운데 선인지 악인지 정의인지 단순한 욕망인지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나이제가 던져진다. 진정 그가 교도소라는 공간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민식과의 싸움을 통해 끝내 손에 쥐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불의와 불법과 부도덕과 맞닥뜨려야 한다. 스스로 직접 오물속에 뛰어들고 만다. 그 끝에 마주하게 될 진실이다.


어쩌면 이제까지 없었던 의학드라마일 것이다. 있는 병을 치료하는 의술이 아닌 없는 병까지 만들어내는 의사들이 등장한다. 실제 현대의학에는 어떤 병들이 있고, 그런 병들은 어떤 증상을 가지는가. 그런 증상을 만들어내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의학에 대한 사람들의 관성적인 믿음을 뒤집는다. 그러면서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들을 직접 끄집어낸다. 어째서 돈이 있고 힘이 있으면 범죄를 저지르고도 수사도, 재판도, 심지어 유죄판결을 받고도 처벌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를 둘러싼 거대한 커넥션이다. 자본과 사법과 행정과 의료와, 아마 나오지는 않지만 입법부 역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한 개인따위 아무렇지 않게 짓눌러 지워버릴 수 있는 그 거대한 힘이 없는 병도 만드는 무소불위의 의학이라는 수단을 통해 만난다. 그래서 흥미롭다. 어떻게 나이제는 없는 병도 만들고 그러면서도 시청자가 통쾌하도록 한 편으로 정의를 실현하겠는가. 김석우 같은 쓰레기는 좀 쳐맞아도 된다. 인간이기에 가지는 솔직한 감정이다.


드라마는 입법부도 사법부도 행정부도 아니니까. 어떤 공적 기관도 아닐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항상 객관적일 필요도 합리적일 필요도 없다. 때로 시청자의 감정과 욕망을 위해 봉사할 수도 있어야 한다. 미워할만한 대상을 마음껏 미워할 수 있도록, 욕하고 싶은 대상을 마음껏 욕해도 좋도록, 그러므로 수단이 불의해도 나이제를 응원하며 그의 성취를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쁜 놈들일수록. 더 흉악한 놈들일 수록. 위기가 있었다. 하마트면 손목이 잘릴 뻔한 위기를 기지와 주위의 도움으로 벗어난다. 이후 보여준 나이제의 인정과 주변의 선의는 과연 어떻게 돌아오게 될 것인가.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바로 인정일 터다.


선민식은 함정을 파고, 나이제는 그에 대응하며 조금씩 틈을 노린다. 아직가지는 선민식이 강자, 나이제는 그에 도전하는 약자다. 선민식의 배후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힘이 버티고 있다. 한 번의 실패와 한 번의 아슬아슬한 성공과 그리고 또 한 번의 충돌이 기다린다. 나이제에게 이것은 과연 기회일까? 아니면 위기로 돌아올까? 물론 선민식을 이긴다고 그것으로 끝은 아닐 것이다. 한소금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소금이 쫓고 있는 진실의 배후에 무엇이 있을까? 한소금의 주변을 또다른 욕망인 이재준이 맴돈다. 더 복잡하게 더 치열하게 그러나 결국에 승리하는 건 정의여야 한다. 드라마에서라도.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