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하는 말이지만 조선은 망해 마땅한 나라였다. 아니 너무 오래 유지되고 있었다. 무려 500년이다. 세계역사에 단일왕조로 500년 넘게 이어진 경우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나라 이름이야 영국이고 프랑스지만 그 안에서도 수없이 많은 왕조가 있었고, 일본의 경우 만세일계라는 그들의 주장과 달리 역대 쇼군들이 실제 왕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왕조마다 서로 정체성도 달랐고, 쇼군들 역시 서로 다른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조선은 처음 건국될 당시의 국가형태를 멸망하기 직전까지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윈도우도 한 번 설치하고 그냥 계속 쓰면 오류가 쌓이는데 하물며 국가단위에서야.
고부에서 동학교도들이 민란을 일으키는데 오히려 고부의 양반들이 가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말이 양반이지 이때 쯤 이르면 양반들 사이에도 층이 생겨서 한양의 벌열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양반대접도 받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지주로서 상당한 재산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토색질이 극에 달했던 세도정치기에는 지방관들이 집중적으로 수탈하는 대상으로 전락하게 되는 이유가 되고 있었다. 전봉준의 아버지 역시 약간의 땅을 소유한 그야말로 짜투리 양반으로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백성의 대표가 되어 대항하다가 죽임을 당한 바 있었다. 전봉준처럼 아예 경제적으로도 몰락해서 이름만 남은 양반들을 잔반이라 부르고, 그나마 황석주처럼 양반으로서 이름이나마 앞세울 수 있는 이들을 향반이라 부른다. 하나같이 중앙의 권력과 단절된 지 오래인 터라 왕명을 받들고 내려온 지방관들에 맞서기에는 실력도 명분도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상태였었다.
영정조 이후의 조선사회가 이전과 크게 달라진 부분이었다. 이전까지는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하는 당색이 남아 있었고, 따라서 대부분 사대부들 역시 각각의 당색에 따라 전국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테면 영조가 즉위하고 소론이 실권하자 절치부심하며 경종의 죽음을 명분삼아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남의 소론들이 상당수 가담했던 것이 그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번이나 같은 일이 반복되며 아예 나중에는 영남출신들의 과거응시 자체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을 정도로 스스로 노론의 당색을 가지고 있던 영조에 대한 영남 소론들의 반발은 거셌었다. 그만큼 지방의 사족들과 중앙의 관리들은 당색을 매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영정조의 탕평책에 의해 당색이 무시당하며 그 끈이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오로지 한양에 머무르며 왕의 눈에 들 수 있었던 이들만이 관직을 얻으며 벌열이 되었고, 아예 그럴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던 지방의 양반들은 관직도 포기하고 지방의 유력자로만 남기를 선택하게 되었다. 황석주가 진사라 불리는 이유다. 이때부터 지방의 양반들은 아예 대과는 포기한 채 겨우 양반신분만 유지할 수 있는 진사시만 보고 마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세도정치로 척족 한 가문이 견제받지 않는 권력으로 독주하기 시작하면서 의미를 잃게 되었다. 그나마 중앙의 권력으로부터 지방을 지켜주던 단 하나의 힘이 사라진 것이다.
흔히 백성들을 수탈하는 양반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러나 정작 대부분 양반들은 엄격한 성리학적 윤리에 따른 도덕적 지배를 실천하고 있었다. 사실 피지배자 입장에서는 더 고약할 수 있다. 허구헌날 공자왕맹자왈하며 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옳은 것 같은 소리들로 백성들이 꼼짝 못하도록 옭죄고 있는 것이다. 때 되면 곳간을 열어 쌀도 풀고 잔치도 열어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굳이 관아까지 갈 것도 없이 어지간한 송사는 지역유지인 양반집 마당에서 해결되고는 했었다. 소작농으로 전락한 백성들로부터 막대한 소작료를 거둬들이는 만큼 백성들이 그같은 지배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도 양반들을 중심으로 의병이 일어났고, 조선사회의 모순이 한계에 이르려 끝내 터져나갔던 조선말기에도 다시 양반들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모여서 나라를 구하겠다고 나섰던 것이었다. 사실상 세뇌다. 당연히 조선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고 사대부가 왕을 대신해서 성인의 말씀으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것이다. 그런 만큼 정도전의 아버지나 황석주처럼 백성들이 탐관오리로 인해 곤란을 겪으면 나서서 항의하기도 하고 민란을 일으키는데 앞장서기도 하는 것이다.
고부에서만이 아니었다. 진주를 비롯해 조선후기 일어난 많은 민란들에서 그 중심에 섰던 것은 그래도 지역사회에서 유지이고 지식인이었던 양반들이었다. 그래서 한계가 많았었다. 황석주가 그랬던 것처럼 민란의 중심에 섰던 양반들은 절대 왕과 조정을 부정하지도 거스르려고도 않았고 단지 지방관의 탐학에 대해서만 징치하기를 행동으로 청원하려 했을 뿐이었다. 왕에게 반역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방관의 잘못에 대해 행동으로써 조정에 알리고 바로잡아주기를 요청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황석주가 전봉준이 고부의 경계를 넘어서려 하는 것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양반출신이던 다른 동학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정과 직접 맞서지 않겠다. 조정에 직접 거스르지 않겠다. 여전히 조선은 왕의 나라이고 사대부의 나라다. 하지만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민란이 일어나고 지방관이 바뀌고 나면 조정은 처음에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하지만 결국에 돌아오는 것은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들에 대한 가혹한 보복과 이전과 같은 지방관의 탐학질 뿐이었다. 여전히 대부분 지방관들은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사서 내려온 이들이었기에 본전을 찾기 위해서라도 더욱 토색질에 열심일 수밖에 없었고 단지 사람만 바뀌었을 뿐 백성의 사정은 전혀 나아지는 것이 없었던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지방관 한 사람 바꾼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이제는 무엇을 바꿔야 하는가. 그야말로 임계점이었을 것이다. 조선후기로 들어서며 더욱 가속해서 누적되는 모순과 그에 따른 사회적 불만과 분노나 터져나오려는 순간이었다. 하긴 그래서 동학이 그토록 조선에서 크게 유행한 것이기도 했다. 동학의 교주 최제우 자신만 해도 재가한 과부의 자식으로 과거도 보지 못하고 장똘뱅이로 떠돌던 분노와 한을 사대부로서 배운 자신의 지식과 교양으로 다듬어 동학이라는 체계를 세웠던 것이었으니. 어차피 양반의 후손인 자신이나 그저 비러먹던 무지렁이 백성이나 세도정치 아래서 치이고 짓밟히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 원래 프랑스혁명 당시도 어차피 같은 처지라 혁명군과 함께했던 몰락한 귀족출신들이 적지 않았었다. 메이지유신 당시도 혁명을 주도했던 것은 천대받던 하급무사 출신들이었다. 그렇게 지배층인 양반사회 내부에서도 불만이 쌓이고 쌓여 오히려 백성들이 일어나기 위한 명분과 논리를 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안타깝다면 그렇게 터져나온 에너지가 결국에 조선조정도 아닌 외세인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 근대 역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장면으로 여기고 있기도 한다. 이미 한계에 이른 조선사회를 안에서부터 바꾸기 위한 에너지가 결국 외부의 힘에 의해 꺾이며 영영 역사의 주도권을 외세에 뺐기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한반도 역사의 흐름은 우리 자신의 의지와 실력에 의해서보다 외세의 목적과 의도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다. 만일 당시 농민들의 봉기가 조금 더 빨랐거나 외세의 개입이 조금만 늦었으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다르게 흘러갔을까 괜한 공상을 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랬다면 이후 한반도의 역사는 우리가 아는 그것과 조금은 다르게 흘러갔을까? 하지만 결국에 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양반 황석주의 존재가 그마저도 회의를 가지게 만든다.
그래도 되는 세상이니까. 그래야만 살아남는 세상이니까. 그렇게밖에 달리 사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달리 살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백가가 조금 달리 살았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까? 백가가 조금 달리 마음을 먹었다면 조병갑도 없고 동학농민봉기도 없었을까? 그러니까 역사에 백가의 이름이 없는 것이다. 대부분 아전들은 그러고 살았다. 대부분 지방관들이 그렇게 백성들을 수탈하며 자신의 부를 불렸던 것과 같다. 아들에게는 누구보다 좋은 아버지다. 백이강을 거시기라 부르며 거칠게 굴리던 것도 나름대로 아버지로서 자식을 생각하는 방식이었다. 원래 얼자란 그런 것이다. 더욱 아전의 얼자란 그리 비참한 존재인 것이다. 차라리 더 독하게. 더 악하게. 누구도 자신을 업수이 여기고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언제부터인가 목적과 수단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무엇이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 것인지.
원래 전봉준은 덩치가 작았다는데 산만한 덩치의 최무성이 실제 역사의 전봉준인 듯 더없이 어울린다. 아마 전봉준이 가진 존재감이 실제 덩치보다 더 크게 보이게 만드는 모양이다. 백이강의 슬픔과 백이현의 모순과 그리고 송자인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모습들이. 그러나 그동안 어느 사극에서보다 적나라한 백성들의 비참한 삶이 보는 이의 가슴을 울린다. 차라리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한다. 차라리 누워 고개를 들 힘조차 없이 잡곡밥 한 주먹에도 양심이고 염치고 모두 내던진다. 남은 것은 악 뿐. 누군가를 원망하는 분노와 증오 뿐이다. 그래서 더 독해지고 그래서 더욱 독해져야만 한다. 그래서 더럽고 추레한 군상들의 모습이 더없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아마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란 이런 것일 터다.
그러고보면 언제부터인가 TV드라마에서 실제 사람이 사는 현실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긴 아주 전부터였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그럼에도 억지로 희망을 보여주려 했었다.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다. 가난해도 인정이 있으면 얼마든지 더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나마도 이제는 화려한 재벌의 일상이나 잘나가는 전문직들의, 아니 입으로는 서민인데 도저히 서민같지 않은 수많은 PPL로 가득한 삶들만이 화면을 채우고 있을 뿐이다. 현실과 한참 거리가 먼 과거의 이야기에서 더욱 현실과 가까운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은 어째서인가. 하필 드라마를 방영하는 방송사가 SBS라는 것만큼 적나라한 아이러니다. 삶이란 자체가 역설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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