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의사 요한 - 너무 일찍 나온 답, 일장연설의 피로감

까칠부 2019. 7. 28. 07:44

내가 일본드라마를 더이상 보지 안게 된 이유다. 거의 반드시라 해도 좋을 정도로 끝날 때가 다가오면 누군가 나와서 일장연설하는 장면이 나온다. 때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게 되는 것도 있지만 워낙 일본인들과 사고나 가치관이 달라서 그런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았다. 음악까지 잔잔히 깔리는 가운데 모두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심각하게 듣고 있으면 세상에 그런 코미디가 없다. 차라리 리갈하이는 연설을 해도 위악적인 캐릭터와 연출이 자연스럽게 연기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마저도 두 번 보면 짜증알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상당히 심오한 주제일 것이다. 삶과 죽음이란. 그 사이에서 판단해야 하는 의사의 소명이란. 그럼에도 살릴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살리기 위해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가? 과장의 말처럼 정답이란 것이 있을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저마다 자기만의 답이 있고 그 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차라리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의사들끼리 다투고 갈등하며 나름의 답을 증명해가는 방식이었으면 어땠을까? 등장인물들의 입이 아닌 행동을 통해, 그런 과정들을 통해 시청자 스스로 답을 고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반전을 기대했던 것이었다. 수많은 고민이 있고 방황과 좌절이 있은 끝에 전혀 생각지 못한 자기만의 답에 이른다. 하지만 드라마가 선택한 것은 배경조차 없는 텅빈 공간에 떠도는 주인공들의 말이었다. 너무나 진지하고 심각한 그 대화가 참을 수 없이 오글거리게만 여겨졌다.

 

그러고보면 의학드라마치고 환자를 치료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병원의 모습이란 것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두 주인공 차요한과 강시영을 제외하고 대부분 의사들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존재감마저 희미하다. 그래서 차요한의 말도 강시영의 말도 배경마저 사라진 공간처럼 일방적으로 쏟아지듯 들린다. 그렇다고 그 주장과 논리가 정교하고 타당해서 마냥 끄덕이며 듣게 하는 것도 아니다. 개인의 주관과 감상이 주인공의 권위와 연출의 효과까지 더해지며 강요하듯 들리게 된다. 결국 다 듣기도 전에 반발부터 하게 된다. 오그라드는 손가락에 더는 못 보겠다.

 

소재도 주제도 흥미로운데 대본과 연출이 그를 받쳐주지 못하고 있다. 연설을 듣기 위해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니다. 작가와 제작진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자고 드라마를 보는 것도 아니다. 국민을 가르치려는 캠페인도 아니고 정부가 주도해서 만드는 계몽드라마도 아니다. 더 민감하고 그래서 더 답이 없을 문제에 너무 성급하게 답을 내리고 만다. 충분히 고민할 수는 있지만 확신까지 가질만한 내용이 아니다. 살면서 가장 깨닫게 되는 것이 확신하는 정의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 그 순간 드라마가 전혀 달리 보인다. 지켜봐도 되는 것일까?

 

하긴 차요한이란 매력적인 만큼 꽤나 다루기 까다로운 캐릭터일 것이다. 단 10초만에 단지 드러난 증상만으로 환자의 상태를 파악한다.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성실한데다 비교대상조차 없을 정도로 실력까지 뛰어나다. 그런 완벽에 가까운 의사캐릭터로 병원을 배경으로 만들 수 있는 갈등이라 다툼은 무엇이겠는가? 고민과 방황은 또 어떤 것이 있겠는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더 익숙하고 더 자연스럽다. 차요한보다 배우 지성의 매력과 연기가 그 공간을 채우며 시청자를 속인다. 차요한이 아니다. 배우 지성이다. 이세영은 확실히 미인이다. 눈은 보람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