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악마가 너의 이름을 부를 때 - 뒤늦게 불려지는 이름, 그리고 앓이

까칠부 2019. 8. 29. 11:24

나도 가끔 그런 때가 있다. 무명 시절부터 나만 알고 있던 아티스트이고 작품인데 뒤늦게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고 칭찬하면 왠지 냉소적이 된다. 그때는 왜 가만 있다가 이제 와서야...


아마 신대철이 1990년대 신중현을 재발견한다 뭐한다 난리가 났을 때 그리 이야기했을 것이다. 신중현은 항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는데 이제와서 재발견한다고 소란피우는 이유가 무엇인가. 산울림도 한동안 잊혀졌다가 1990년대 말 재결성되며 한바탕 큰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원래 대중이란 그렇게 변덕스런 것이다. 비틀스의 라이벌로 거론되던 미국 밴드 비치보이스의 앨범 펫사운드도 당시에는 철저하게 대중과 평론가들로부터 외면받았다가 1980년에 들어서야 재평가된 바 있었다. 그리고 펫사운드가 재평가되었을 때 주위의 반대를 무릎쓰고 앨범을 주도해서 만든 브라이언 윌슨은 대중과의 소통에 실패한 결과 정신이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도 뒤늦게라도 알아주는 것이 어디인가.


지금도 많은 이름없는 음악인들이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음에도 음악을 붙잡고 지탱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아니 음악인들만이 아니다. 모든 창작인들이 꾸는 꿈이다. 그러면서 절망이다. 언젠가 자신이 죽은 뒤에라도 자신이 남긴 작품을 알아주는 이가 나타날지 모른다. 그래서 다시 세상이 자신의 작품들을 알아봐 준다면 자신은 작품과 함께 불멸의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먼 나중 일이고 과연 자기가 살아서 자기 작품을 알아봐 주는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고갱도 고호도 죽은 다음에야 그들의 작품을 세상이 인정했고, 렘브란트의 말년은 외롭고 가난했었다. 그럼에는 언젠가 알아봐 주겠지. 누군가 알아봐 주는 사람이 나타나 주겠지. 그러다 때로 그런 간절한 바람이 세상에 대한 분노로 원망으로 바뀌기도 한다. 어차피 나 하나 없어도 아무 걱정없이 돌아갈 세상따위.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저들은 결코 나를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런 최악의 절망 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주고 평가해 준다면 그 기분이 어떠할까?


오히려 김이경이 아닌 하립이 떨고 있었다. 김이경은 괜찮은데 하립이 더 설레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하립은 다시 예전의 서동천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음악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자신의 음악이었다. 마음껏 노래하고 마음껏 연주하며 마음껏 환호받는다. 자신이 그토록 그 긴 세월 동안 꿈꿔 온 그대로. 그런데 당황스럽다. 자신의 음악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음악이던가.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분노했었다. 그보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음악이나 만드는 자신에 대한 환멸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세상이 알아줄만한 음악을 만든다. 모두가 듣고 좋아할만한 음악을 만들고자 한다. 그래서 서동천으로는 누리지 못한 큰 성공까지 누리고 있었다. 막대한 부와 높은 명성, 그에 어울리는 힘이 자신에게 주어졌다. 그러니까 이것은 옳다. 이것이 정답이었다. 그렇게 자신을 납득시켜 온 시간들이 그 젊은 신인들에 의해 부정당하는 기분이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자신보다 더 옳은 답이었다.


앓을 수밖에 없다. 감정의 배탈같은 것이었다. 그동안 너무나 간절히 바라오던 일이었기에. 그러나 결국은 안될 것이라 포기했던 것이었기에. 그래서 결국 포기하고 외면했던 자신의 길이 전혀 기대하지 않은 순간 해일처럼 자신을 덮쳐 온다. 미처 감당하지 못한 감정과 열정이 열병이 되어 그를 앓아 눕게 만든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성장통이었다. 그러나 과연 달갑기만 한가면 늦게나마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게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닌 젊은 김이경이었다는 것이다. 30년 전에도 서동천은 아마 자신보다 인기를 독차지했던 이충열에 대한 질투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깨어난 하립과 김이경은 마주했던 것일까?


하지만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인간의 운명이 그렇게 순조롭게만 풀릴 리 없다. 겨우 다시 만난 아들은 다시 목숨을 건 수술을 받아야 하고,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준 김이경은 악마에게 영혼을 넘겨야 하는 1등급 영혼의 소유자로 밝혀진다. 최고의 순간에 그는 다시 선택해야만 한다. 악마의 과거와 그리고 김이경을 지키는 수호자와 악마를 연인이라 오해하는 지서영의 사정까지 서로 뒤엉킨다.


늙어서라도, 아니 전혀 다른 자신이 된 뒤에라도 세상의 인정을 받고 자신의 음악을 환호 속에 연주할 수 있었던 하립은 얼마나 행운아인가? 아니 불운아인가? 그럼에도 자신을 서동천이라 밝힐 수 없고 누구도 자신을 서동천으로 알아봐 주지 않는다. 다시 세상의 주목을 받는 서동천은 자신이 아닌 과거의 누군가다. 영혼까지 팔아가며 살려야 했던 아들 앞에서도 그는 아버지 서동천으로 나설 수 없었다.


진지한가 싶다가도 적당히 분위기를 반전하는 코미디와 우스꽝스럽다가도 다시 정색하게 만드는 깊이가 교차하는 재미가 있다. 마냥 웃고 있을 수도, 그렇다고 마냥 진지해지지도 않는다. 메시지는 확실하다. 음악을 소재로 한 드라마 가운데 취향에 맞는 것이 드물었던 것을 생각하면 뭔가 새롭고 특별한 느낌이랄까. 아무 생각없이 봐도 좋고 의미를 부여하며 봐도 상관없다. 어쨌든 상업드라마로서 충분히 재미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립 아닌 서동천과 김이경의 나이차이를 생각해 보면. 그럼에도 벌써 10년 전부터 그들은 서로를 가장 이해해주는 동지였을 것이다. 예고편은 안 보는 편이 나았다. 힘이 빠지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