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재앙으로부터 도망조차 칠 수 없게 만든다면 사랑은 그 자체로 모든 악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 사랑으로 인해 질투하고, 사랑으로 인해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며, 끝내는 사랑의 이름으로 사로를 속이고 파괴한다. 인간이 저리는 수많은 죄악 가운데 대부분이 바로 이 사랑으로 인한 것이다.
신을 사랑했기에. 아버지를 사랑했기에. 그래서 질투하고, 그래서 원망하고, 그래서 분노하며, 그래서 그에게 도전하려 한다. 어쩌면 그런 자신이라도 돌아봐주기를 바라는 어리광이 아닐까. 그리고 무심한 부모는 그런 자식을 바로 발가벗겨 집밖으로 내쫓는다. 어째서 서로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은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지지 않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신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지독한 이기는 이타다. 차라리 자기을 죽여서라도 지키고픈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 그래서 가장 지독한 이타 역시 이기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타는 그냥 위선이고 기만이다. 자신을 위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롯이 자신을 위한 것일 터다. 아들을 사랑하는 것도 자신, 이경을 사랑하는 것도 서동천 자신, 그런 자신을 악마와의 계약으로부터 구하고 싶은 것도 자신이다. 그 선택지에서 하립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양심 또한 이기이며 욕심이다. 그래서 선해지려 악해지고 정의로우려 죄를 짓는다. 그럼에도 선텍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슬픔일 것이다. 선택하지 않는 것조차 선택이다. 그 책임은 오롯이 자신에게 돌아간다. 굳이 악마와 계약하지 않아도 매순간 인간은 우연이라는 이름의 운명과 계약하며 살아간다. 하립이 지키고 싶은 것. 서동천으로서 지키고 싶은 것. 그를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그것은 악마가 과거의 어느 시간에 놓아두고 온 것일지 모른다.
과연 그것은 오빠를 위한 희생이었을까? 아니면 오빠만 바라보는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을까? 차라리 복수였을 지 모르겠다. 자신이 모든 짐을 짊어짐으로써 어머니와 오빠는 속죄의 기회마저 잃어 버렸다. 동생의 희생을 온전히 기뻐할 수만 없는 선함이 평생의 구속과도 같은 고통에 얽매게 한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가족인 서로로부터. 그럼에도 행복해지려 발버둥칠수록 그 족쇄는 더 강하게 옭죄일 뿐이다. 누군가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다시 서동천으로 돌아온다. 그 저주스럽도록 비참하던 이름으로. 자신이 그토록 버리고자 했던 자신으로. 이경에게 강제로 자신의 과거 진실과 마주하게 한 그 순간. 자신으로 돌아온 서동천이 마침내 마주하게 되는 진실과 진심은 무엇일까. 마음은 흘러간다. 인간의 이야기처럼. 그가 두고 온 것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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