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타인은 지옥이다 - 허술한 문 너머, 예민하고 날카로워져야 하는 누군가들

까칠부 2019. 9. 29. 14:05

아래로 내려갈수록 문 역시 허술해진다. 문이란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수단이다. 오롯이 자신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세상으로부터 격리하고 보호해주는 가림막이다. 문의 크기와 개수와 강도는 따라서 자아의 강도와 비례한다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아무나 아무때나 들어올 수 있는 허술한 문이란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빈곤함과 나약함을 뜻한다 할 수 있다.


고급 아파트 단지에서는 입구에서부터 엄격하게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하고는 한다. 같은 단지에서, 같은 동에서, 그러고도 정작 자신의 집 현관부터는 감히 엿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아주 오래전 살았던 외지고 낡은 월세방에서는 옆집 커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숨소리까지 모두 들리고 있었다. 당연히 주인집에서 아무때고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방세를 재촉하는 것은 일상이나 같았다.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담과 틈이 보이지 않는 견고한 철문, 그리고 각종 보안시스템으로 덕지덕지 채운 부유한 동네의 저택들과 잠긴 문조차 아무나 열 수 있는 고시원의 풍경은 어째서 이토록 적나라하게 비교되는가.


단순히 공간을 나누는 문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참 부러운 대사다. 내 변호사와 이야기하라. 대부분 사람들은 분쟁이 있으면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 경찰이나 검찰로부터 수사를 받거나 혹은 아예 소송이 벌어지더라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사정을 설명하고 억울함을 풀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설사 상대가 악의를 가지고 다가와도 그를 차단하고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누군가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일상은 평화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자신의 이익과 평화로운 일상을 침해하려는 누군가의 악의로부터도 자신은 언제나 안전할 수 있다.


같은 돈을 가지고도 누군가는 전문가를 고용해서 안전하게 그 돈을 관리하는 한 편 누군가는 자신이 직접 운영하며 리스크까지 감수해야만 한다. 나 역시 내 돈을 지키고 싶은데 그 지키는 자체에 들어가는 비용과 수고를 감당하지 못해 때로 막을 수 있었을 손실까지 감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돈만을 전문적으로 노리는 사람들까지 생겨난다.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있지만 과연 자기보다 더 돈많고 더 잘난 누군가가 그녀를 사랑하여 다가온다면 그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아무나 자기가 없을 때면 찾아와 열고 들어올 수 있는 고시원의 문과 자기가 없는 사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는 선배의 존재가 그래서 엇갈리며 겹쳐 보인다. 저들이 내 것을 넘보고 있다. 내 것을 노리고 나만의 영역으로 들어오려 하고 있다. 그런데도 막을 수 없고 지킬 수 없다. 아니 그럼에도 막고 지켜야 하기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단단한 문을 믿고 안심하고 있으면 되는 것을 자신이 직접 문이 되어 밖을 감시하며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시원이다. 오로지 문 하나로 세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아주 작고 허술한 공간인 것이다. 그곳에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무엇이 있다. 누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사랑이 있다.


어째서 자꾸만 넘보는가. 어째서 자꾸만 엿보고 열고 들어오려 하는 것인가. 여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부수고 들어와 난장판으로 헤집어 놓는다. 고시원만이 아니다.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 대해 말하고 단정짓는 모두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을 정의하고 자신을 움직이려 하는 세상의 모두다. 그것은 그런 세상에 대한 분노이며 그런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그냥 화풀이였다. 상대가 죽거나 아니면 내가 죽거나. 그러고보면 어렸을 적 그 허술한 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납작하고 구불구불하던 동네에서도 그래서 아저씨들이든 아줌마들이든 그리 날카로웠던 듯하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술잔을 나누다가도 살기어린 욕설이 터져나오곤 했었다. 바로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곤 했었다. 경계가 없는 삶이란 그렇게 피곤하고 그래서 하류의 삶이란 고단한 것이다.


지금도 모든 것이 주인공 윤종우의 망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유효하다. 원작이나 드라마 작가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 모든 것은 허술한 문 너머에 신경이 곤두선 누군가의 망상일지 모른다는 것이다. 실제 허술한 문 하나에 기대 살아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바깥의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피해당하는 자신을 상상하고는 한다. 그냥 창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 순간 그렇게 보이면 그 자체로 공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나를 해치려 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만의 영역을, 아니 자신을 넘보려 하고 있다. 빈약한 자아 만큼이나 타락한 그들의 모습은 자신이 향해 가고 있을 어딘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는 가만히 있으려 하는데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다. 문만 튼튼하다면. 담이 높고 튼튼하다면. 그래서 세상과 자신을 안전하게 분리해 줄 수 있다면. 그럴 수 없기에 예민해진다. 민감해지고 날카로워진다. 그래야만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교감신경의 작용이 자칫 자신을 해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우화처럼. 실제 존재하는 고시원이란 공간을 통해서. 타인이 지옥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