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아무도 모른다 -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단 하나의 진실!

까칠부 2020. 3. 11. 14:36

어떤 사람들은 나를 좋은 사람이라 말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말종이라고까지 말한다. 다른 사람 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알려고도 않고 설사 알더라도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고 그래서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어차피 남의 일이라는 게 안다고 아는 게 아니고 모른다고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형사이고 선생이었던 것일까?


친구였다. 20년 전의 최수정도, 20년 뒤의 고은호도. 어쩌면 고은호는 차영진의 아들이기도 했다. 배아파 낳은 아들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엄마보다 더 엄마처럼 그를 보호하며 한 편으로 그에게 기대고 있었다. 하지만 20년 전 최수정이 살해되었을 때도, 20년 뒤 고은호가 호텔 옥상에서 뛰어내렸을 때도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최수정은 죽어야 했고 고은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어야 했는지. 어쩌면 마지막 단서가 되었을지 모르는 전화마저 자신의 사정을 이유로 거부하고 말았었다. 죄책감은 족쇄가 되어 그녀를 더욱 내몰게 된다. 그녀가 형사가 된 이유였다. 어떻게든 자신이 듣지 못했던 진실을 알아내고야 말겠다.


선생이지만 그렇다고 아이들 사이의 일까지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착각이고 오해다. 어차피 아이들 사이에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고 이미 어른인 선생이 그 사이에 끼어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더구나 단지 대가를 받고 지식을 가르칠 뿐인 대부분 선생들에게는 그럴만한 책임도 의무도 주어져 있지 않다. 그를 위한 어떤 권한도 권위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딱 정해진 만큼만. 딱 주어진 만큼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적당한 거리야 말로 좋은 선생이 되기 위한 최선의 조건인 것이다. 그래서 몰랐다. 고은호와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하지만 이제와서 안다고 달라지는 게 무엇이 있겠는가. 아, 그래서 그는 단순한 선생이 아닌 장차 재단을 물려받을 후계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엄마가 아들을 모르고, 선생이 학생을 모르고, 형사가 피해자를 모르고, 그렇게 의무처럼 가족이기에 함께 살고, 교실에서 마주보고 가르치며, 피해자를 위해 범인을 쫓는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운 것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에. 무슨 일이 어떤 사정이 있었는가 전혀 알지 못하기에.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쫓고 있는가. 누구를 어떤 것을 쫓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지금 차영진은 어디로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한참을 보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은 나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 하나였다. 제목 그대로였다. 그래서 차영진은 쫓고 있는 것이다. 형사로서, 엄마로서, 친구로서. 과연 그녀가 마주하게 될 진실은 어떤 참혹한 것이었을까.


어쩐지 거창해 보이는 교회나 사학재단 같은 것들은 어쩌면 눈가림이었는지 모른다.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관심을 돌리기 위한 함정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자체도 드라마로서 충분히 의미가 있겠지만 그보다는 차영진이라는 한 인간이 평생을 걸고 쫓고 있는 그것이야 말로 드라마가 전하고 싶은 진짜 주제였을 것이다. 평생을 딸의 죽음으로 고통받은 최수정의 어머니조차 알지 못하는 진실이. 그동안 아들을 외면해왔던 엄마로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비밀들이. 형사로서 그동안 수도 없이 파헤쳐 왔던 그 이면의 의미들이. 하지만 어쩌면 그동안 차영진은 역시 수도 없이 그것들을 지나쳐 왔었는지 모른다.


모른다 생각하니 비로소 이해가 된다.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자연스러운 혼란과 어수선함이야 말로 이 드라마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괜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그냥 모르고 있다. 그래서 그 진실을, 비밀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로. 세상 사이로. 아직 감히 예상할 수조차 없다. 사람들 사이에 숨으면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다. 사람의 진실이 사람의 거짓을 가린다. 사람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