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이들이기 때문이다. 아예 도망치려 했다면 도윤완처럼 굳이 환자의 주위에 머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사이고 싶고 의사로서 살아가고 싶었기에 그동안 필사적으로 타협하며 지나온 결과가 지금 모습들이었던 것이다. 비겁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기에, 환자로 인해 받은 상처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했기에,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에. 그러니까 박민국이란 줄을 잡고 열심히 쫓아가다 보면 자신도 의사로서 번듯하게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다만 그동안 너무 멀리 왔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돌아가기엔 늦었다. 지금까지의 방식을 부정하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하지만 너무 쉽고 간단했다. 어차피 자신은 의사였다. 그동안도 줄곧 의사였었다. 굳이 이제까지의 자신을 부정할 필요 없이 앞으로의 목표만 바꾸면 되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해 오던 방식들을 지키면서도 다만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달리 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을 온전히 들어주고 받아들여 주는 상대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어쩌면 부용주는 처음부터 박민국의 그같은 의사로서의 본성을 꿰뚫어 보았는지 모른다. 하긴 그런 동기가 내면에 잠재되어 있지 않았다면 굳이 사고난 버스에서 피하지 않고 환자를 치료하던 부용주의 모습을 10년도 더 지나서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도 저렇게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아니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냥 한 걸음만 앞으로 나갔으면 되었을 것인데. 굳이 버스 안에서 사람을 살리려 애쓰지 않아도 일단 먼저 피한 뒤 버스 밖에서 구출된 사람들을 치료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버스 안에서만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러고 싶었는데 붙잡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기껏 부용주의 말 몇 마디에 돌아서기에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었다. 그래도 부용주와 대등해지고 싶었다. 같은 눈높이에서 마주보고 싶었다. 의사로서 살아온 지난 시간에 대한 작은 고집일 수 있었다. 환자가 있다. 환자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 그보다 더 멋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양호준도 환자를 치료하는데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말에 두 말 없이 도윤완의 곁을 떠나 박민국에게로 돌아간다. 의사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핑계와 명분은 없는 것이다.
어쩌면 돌담병원 입장에서도 다행일 것이다. 전원장은 사람은 좋았지만 너무 주먹구구였었다. 시스템을 중요시 여기는 박민국이라면 돌담병원을 조금 더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부용주의 열정과 박민국의 냉철한 계산이 더해지면 독립법인으로서 조금 더 괜찮아지지 않을까. 그래서 여원장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그 뒤를 잇듯 박민국도 자신의 길을 되찾게 되었던 것이었다.
서양의학이 마침내 현대의학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이유였다. 부용주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돌담병원에서만 하고 있는 일이 아니란 것이다. 의사들이 자신이 경험과 연구결과를 서로 공유하면서 서양의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지금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의학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해외의 사례와 논문을 통해 증상의 원인을 찾고 치료법도 알아낸다. 지구촌 어느 구석에서 발생한 사례까지 네트워크가 발달한 지금은 거의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하지만 보여주고 싶은 것이었을 게다. 어떻게 의사가 의사로서 환자를 치료하는가. 아니 의사만이 아닌 간호사를 포함한 의료인들이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가.
머리를 맞대고 하나하나 사례를 찾아가며 증상을 찾아간다. 치료법을 찾아낸다. 마지막 숙제였다. 혼자 풀라는 것이 아니었다. 선배와 동료 의사들이 그동안 쌓아 올린 수많은 데이터 가운데 필요한 것을 모두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찾아낸다. 어이없을 정도로 부용주의 수술은 쉽게 끝나고 도윤완의 계획도 전회장의 유언에 따라 좌절되고 만다. 설마 돌담병원의 독립법인화가 부용주가 숨긴 마지막 패였을 줄이야.
항상 느끼는 거지만 유쾌하다. 명쾌하고 통쾌하다. 그런 게 또 낭만이기도 하다. 낭만은 직관의 세계에 존재한다. 복잡하게 머리로 따지고 계산할 필요 없이 오로지 자신의 직관만으로 당위를 쫓아가는 것이다. 그래야 하니 그렇게 한다. 그렇게 하고 싶으니 그래야만 한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 또 그래야만 한다. 복잡한 고민들이 쓸데없는 허튼 짓인 양 여겨지기도 한다. 의사니까. 병원이니까. 한 팀이니까. 원래 영웅들은 그런 일들을 당연하게 해낼 수 있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카멜롯처럼. 그래서 그들은 모여든다. 모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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