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스위트홈 - 괴물과 인간, 그리고 집의 의미

까칠부 2021. 1. 4. 06:01

집이란 무엇인가? 어쩌면 인간의 가장 선한 본모습이 드러나는 공간일 것이다. 한 편으로 가장 위선적인 가면들로 채워진 공간이다. 밖에서는 사기꾼 살인자다.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그리고 죽음으로 몰아간 그야말로 악당이다. 그런데 자기 아내, 자기 부모, 자기 자식들에 대해서만큼은 누구보다 상냥하고 따뜻한 선량한 인물이다. 무엇이 그 인물의 본모습일 것인가. 인간의 본모습은 악에 있는가? 선에 있는가?

 

그런 점에서 차현수의 가족은 최악 가운데서도 최악이었다. 가족이기에 마음놓고 위선조차 아닌 위악을 부릴 수 있었다. 같은 가족을 외면하고 부정하고 매도한다. 사람을 대할 때 가지는 가장 최소한의 긴장조차 놓아 버린 채 자기 편한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한 편으로 그런 것도 가족이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그들의 선함이란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의 선함이고, 그런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어머니의 선함이고, 그런 부모의 사정을 이해하는 자식의 선함이다. 그래서 차현수는 나쁜 자식인 것이다. 그냥 좀 쳐맞지. 그냥 좀 괴롭힘당하고 말지. 누가 뭔 일을 당하든 그냥 무시하고 말지. 그로 인해 자신들의 선의가 부정당할지 모르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차현수 자신은 당연하다 옳다 여겼던 판단들이 정작 가족들로 인해 갈 곳을 잃고 만다.

 

전혀 상관없는 남이었다. 은혁, 은유 남매나, 윤지수나 정재혁이나 편상욱이나. 괴물이 나타자기 전까지 대부분 서로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괴물이 나타나고 그들은 처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괴물들로 인해 격리된 상황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이해하며 서로에 기대야 하는 관계가 되었다. 서로의 존재가 없이는 자신 역시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진심이 된다. 진심으로 욕하고 진심으로 비난하고 진심으로 싸우다가 결국 진심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들은 함께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해하고 관용하고 공존한다. 생존이라는 이기를 위한 위선일수도 있고, 더욱 그렇기 때문에 생존이라는 절박함속에 드러난 본모습일 수도 있다. 서로를 이해하고 관용하지 못한다면 결국 혼자서 따돌려지다가 의미없이 죽고 만다.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밖에 없고, 서로를 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타가 이기가 되고 이기가 이타가 된다. 솔직하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이해받으며 같은 공간에서 그들은 살아갈 수 있다.

 

집 가家자는 지붕 아래 울타리를 상형한 것이다. 가족이란 같은 울타리 안에서 같은 목적과 이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차현수가 가족들과 겉돌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가족의 목적과 자신의 목적이 다르다. 자신이 바라는 것과 가족이 바라는 것이 다르다. 그러나 이제는 같다. 괴물들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는 당위로 인해 그들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전혀 모르던 타인이 누이가 되고 형제가 되고 부모가 되고 친척이 된다. 그런 점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한두식은 차현수에게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같은 존재다. 그런 한두식의 존재가 있었기에 차현수도 모두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죽을 줄 알면서도 아파트를 혼자서 나설 수 있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동생이기에, 그리고 그동안 자신이 책임져 왔던 가족들이기에 은혁 역시 기꺼이 괴물이 되기 위해 혼자 남을 수 있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크리쳐물이란 원래 인간사회에 던져진 외계의 존재라는 충격이었을 텐데, 그래서 드라마에서는 인간 스스로 변신한다는 설정을 취하고 있었다. 만화 '진격의 거인'에서 도시의 성벽 위에서 굽어보는 거인의 모습에서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을 느낀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두려워 할 때 인간은 괴물이 된다. 어떤 괴물보다도 흉악하고 끔찍한 모습의 괴물로 비치게 된다. 결국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욕망인 것이다. 괴물이 되고서도 끝내 아내를 찾아 사과의 말을 전해야 했던 김석현처럼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어떤 충동이고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괴물들에 둘러싸인다. 인간인 자신들을 해치는 또다른 인간의 추악한 욕망에 둘러싸이고 만다. 그런 속에서 정글처럼 서로 뒤엉키는 인간의 욕망과 감정들이 조금씩 관계를 만들어간다. 함께 살 수밖에 없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때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제목이 스위트홈인 것이다. 과연 인간에게 집이란 어떤 공간인가? 가족이란 어떤 존재인가? 무엇이 그곳을 집으로 그들을 가족으로 여기게 만드는가? 그 속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그래서 괴물인 것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그것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형상을 잃은 존재들인 것이다. 마지막까지 인간이고 싶었고 인간으로 죽고 싶었던 그들의 선택이 인간의 가려진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추악한 욕망과 본능에 사로잡힌 군상들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해서 관계를 만들고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가.

 

그곳은 집이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가장 안전한 공간이다. 서로 싸우고 때로 의심하고 원망하면서도 결국 서로에게 기대어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집이고 가족인 것이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물론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믿을 뿐이다. 이것이 가족이다. 이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런 뻔하고 흔한 물음과 대답 만큼 크리쳐물의 정석을 지키면서 일상처럼 드라마는 펼쳐진다.

 

역시 한국 드라마의 다양성을 막고 있던 것은 돈줄을 쥐고 있는 방송사의 관료적인 안이함과 편의주의였을 것이다. 과감한 투자가 이렇게 한국 드라마의 한계를 넓힌다. 그야말로 한국 드라마의 전형과 장르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한 설정에 스토리에 연출임에도 그 자체로 새로울 수 있었다. 한국다운 미학과 주제의식이 그런 당연한 익숙함마저 새롭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놀라운 것은 없지만 당연해서 새롭다는 특별한 느낌이다. 넷플릭스를 계속 봐야겠다.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