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일반

승리호 - 스페이스 로망스, 기본을 잃지 않은 알찬 변주

까칠부 2021. 2. 8. 04:45

펜타일에 wrgb지만 그래도 역시 화면 큰 게 좋다. 흰색 화소 덕분에 화면이 짱해서 더 영화보기에 좋다. 어차피 동영상은 일정 거리 떨어지면 화소 따위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까. 요즘 눈이 더 나빠진 것 같기도 하고. VA만의 암부와 명암비가 특히 동영상에서 입체감과 깊이감을 더해준다. 그냥 좋단 소리다.

 

스페이스 오페라란 스페이스 로망스다. 실제의 사실과 상관없이 일반의 관성적인 믿음과 바람 위에 쓰여진 기사이야기나 군담소설, 혹은 무협소설처럼 그래서 일정한 클리셰 위에서 완성될 수밖에 없다. 어쩐지 그럴 것 같은, 어째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그렇기 때문에 그러기를 바라는 이야기들이다. 그들은 고귀한 신분을 가진 떠돌이 기사이며 신분을 감춘 낙향한 무사인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그러나 모두를 위해 희생하며 마침내 그들을 구원해낸다.

 

우주는 그런 영웅들을 위한 배경이다. 무한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야 말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영웅들을 위한 배경이 되어 준다. 나머지 이야기는 기존의 클리셰들의 답습이다. 그러므로 얼마나 흥미롭게 새로운 요소들을 기존의 클리셰 위에 버무려내는가. 클리셰를 부정하는 순간 장르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클리셰란 장르를 존재하게 만드는 토대와도 같다. 정직하게 클리셰를 따르면서도 그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지나고 나면 뻔한 이야기에 무릎을 치면서도 지나는 동안에는 그저 감탄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우주를 마음껏 누빌 수 있게 된 시대임에도 묘하게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느껴지는 이유인 것이다. 도대체 우주선의 엔진을 작동하는데 굳이 사람이 들어가서 일일이 그것도 힘까지 써가며 조정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아니 지금 대기권을 날아다니는 전투기들조차 플라이바이와이어에 의해 전기적으로 모든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조종간을 잡은 김태호 역시 매번 땀까지 흘리며 온 힘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야 그럴싸하니까. 로봇이 작살을 쓰고, 레이저총을 조립해서 전투기를 조준해 격추하고, 그런 모습들이 더욱 사실이 아닌 현실로써 모든 과정들을 직관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역시 사람들의 믿음과 기대 속에 싸움이란 이렇게 직접 몸을 움직여 땀을 흘려가며 힘쓰며 해야 하는 것이다.

 

쫓기는 소녀가 있고, 과거를 감춘 채 사회의 밑바닥을 떠도는 영웅들이 있다. 불우한 현실에 묻혀 있던 영웅들은 그러나 소녀를 구하며 거대한 악과 맞서고 마침내 세계를 구원하게 된다. 우주적 규모의 거대자본은 스페이스 오페라의 오래된 악역이었다. 기자를 살해하는 장면부터 김태호에게 굳이 돈을 쥐어주는 장면까지 어째서 설리반이 그토록 승리호에 집착하는가 하는 것도 그동안의 클리셰에 기대어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었을 것이다. 30억이 넘는 지구인의 목숨을 그깟 비천한 것으로 여길 수 있는 그의 편집증은 그의 과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런 설리반과 악연이 있는 장선장과 김태호가 소녀를 매개로 그와 맞서며 마침내 지구를 구한다. 영웅이 된다. 물론 그 보상은 너무나 사소한 곗돈을 들고 튄 돼지아빠를 잡고 업동이가 사람의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원래 영웅이란 그런 것 아니던가.

 

우주선의 디자인도 그렇고, 우주정거장들의 모습도 스페이스 오페라의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 그냥 아무 작품에나 갖다 붙여도 전혀 어색할 것 같지 않는 정석적인 디자인들이다.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장르란 클리셰라고 소재를 가지고 만드는 공예품 같은 것이다. 서로 다르지만 그러나 같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장르물은 소비된다. 대부분 좀비물들이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듯 스페이스 오페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내용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한국인들이 일상적으로 가지는 관성적인 무엇일 것이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마는.

 

놀랍거나 새로운 것은 없지만 알차고 즐겁다. 딱 기대한 만큼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쉽지 않다. 욕심이 지나치면 일일이 하나하나 설명하느라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이 부족할 수 있다. 욕심을 덜고 그만큼 재미로 내용을 채워 넣는다. 주제도 그만하게, 완성도도 그만하게, 그러면서도 자기만의 개성을 놓치지 않는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극장개봉으로 최소 500만 이상은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 작품이었다. 선정적이거나 잔인한 장면도 거의 없는, 오로지 말 그대로 우주활극 자체에 집중한 작품이라 가족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란 점에서 더 가치가 있다. 모니터 바꾼 보람이 있단 것이다. 이런 넷플릭스가 있는데 KBS에 굳이 수신료까지 더 주어야 하는가.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제대로 만든 스페이스 오페라를 볼 수 있구나. 그냥 예고편만 보고도 내용이 거의 예상될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보는 내내 재미가 있었다. 헐리우드의 어지간한 SF와 비교해서도 만듦새가 훨씬 좋다. 한국 영화의 발전을 몸으로 느끼게 된다. 기대조차 않고 있었다. 벌써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된다.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