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일반

한국 대중음악과 고음, 시대의 요구와 미덕과 가치

까칠부 2024. 1. 7. 03:20

확실히 80년대 이전보다 지금 가수들이 고음을 더 잘 낸다. 아니 노래 자체가 예전 노래들에는 고음이 그다지 없었다. 80년대 이후 고음이 들어간 노래도 많아지고 그런 노래를 소화할 수 있는 가수들도 늘어났다. 오죽하면 예전 불후의명곡에서 당시 게스트로 출연했던 현미가 요즘 가수들 왜 이리 하이가 잘나오냐고 감탄하고 있었겠는가. 그런데 과연 그동안 무슨 유전적인 변화라도 생겨서 가수들이 고음을 잘내게 된 것일까?

 

우리 아버지가 생전에 노래를 들으면서 하시던 말씀이 있다. 노래가 재미가 없다. 노래가 맛이 없다. 그를 표현하는 단어가 구성지다는 것이다. 요즘은 오히려 잘 쓰지 않는다. 노래를 재미있게 맛있게 부르는 것을 예전에는 구성지다 표현했다. 하춘화는 그래서 또 이것을 잘 넘긴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넘기는 소리다. 바로 고음노래의 구조적인 문제다. 고음으로 올라갈수록 목소리에 개성도 사라지고 표현도 단순해지기 쉽다. 고음은 그냥 고음이다. 

 

가끔 자기 고음 자랑한다고 일부러 노래의 키를 올려 부르는 가수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다. 오히려 너무 높여 부르니 노래의 맛이 사라진다. 노래에서 느껴지던 감정 같은 것이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쇳소리같은 무미건조한 고음에 노래가 억지로 실려가는 느낌이다. 노래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한 음역대가 있다. 임재범의 '그대는 어디에'를 여자가수가 더 높은 음역대에서 소화해 불러도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임재범보다 음역대가 높아서 오히려 진성으로 노래를 소화하더라도 정작 임재범이 불렀을 때와 같은 처절한 감정을 느끼기 힘들다. 그래서 임재범과 이승철이 대단한 것이다. 고음역에서도 노래가 전하고자 하는 감정을 오히려 기교마저 최대한 억제하면서 충실히 전달할 수 있다. 이른바 김나박이란 그런 것이 가능한 가수들이다. 

 

전성기 시절 김종서에 대한 평가가 오히려 박했던 이유였다. 고음은 잘 되는데 정작 노래의 감정표현에서 약점이 뚜렷하다. 박완규도 그래서 일부러 목소리의 톤을 낮춘 것이기도 했다. 고음은 미친 듯이 올라가는데 정작 가장 중요한 중음역대 이하에서 감정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고음에서도 고음만 잘 올라갈 뿐 감정이 제대로 실리지 않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김경호는 진짜 대단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음역대에서 노래가 전하고자 하는 감정을 최대한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건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전성기 때는 되었다.

 

아무튼 오래전 가수들에게는, 아니 대중들에게는 고음이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음역대가 넓고 고음이 잘 올라가고 하는 것은 그다지 관심사가 아니었다. 얼마나 노래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가수가 잘 전달할 수 있는가. 가수의 음색과 기술이 얼마나 노래와 잘 어우러질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자신이 가장 노래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음역대 안에서의 음색과 기교가 더 중요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것은 외국도 마찬가지라 로버트 플랜트가 나와서 고음의 시대를 열기 전까지는 고음에 큰 가치를 두는 경우가 드물었었다. 그리고 그렇게 외국에서도 주로 락밴드를 중심으로 고음역이 중요하게 여겨지면서 80년대부터 그 영향을 받아 한국가수 가운데서도 고음에 방점을 두는 경우가 늘어나게 되었을 뿐이었다.

 

실제 80년대 이전 해외의 팝을 들어보면 고음에 큰 가치를 두는 음악은 오히려 드문 편이었다. 거의 하드락 밴드들 사이에서나 고음이 중요했지 굳이 고음을 내려 악을 쓰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면서 고음역을 가진 보컬들이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도 역시 그를 뒤따라 고음역을 가진 보컬들이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던 것 뿐이었다. 노래의 맛이나 감정따위와 상관없이 그저 고음만 잘나오면 잘하는 것이다. 물론 고음이 잘 나오면 그보다 더 낮은 음역대에서 보다 수월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전 가수들 가운데서도 굳이 억지로 고음을 내려 하면 얼마든지 가능했을 가수들도 그런 점에서 적지 않았을 것이라 감히 예단하기도 한다.

 

아무튼 같은 노래를 굳이 키를 높여가며 쇳소리로 불러대는 가수들을 보면서 문득 떠올린 생각일 것이다. 굳이 노래를 저렇게 불러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런 것을 또 좋아라 환호하는 대중들을 보고 있으면 그러니까 저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내가 처음 듣기 시작한 노래들은 그보다는 보다 감정을 절제하며 노래가 전하고자 하는 감정에만 충실하던 것들이었다. 노래경연의 전성시대에 쓸데없이 소리만 질러대는 가수들에 거슬려하던 이유이기도 했다. 굳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또한 저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되었다.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필요도 미덕도 모두 바뀌게 되었다. 그럼에도 또한 여전히 가장 대중적인 발라드에서는 무리한 고음보다는 감정선이 잘 살린 아름다운 미성과 그를 뒷받침하는 절제된 보컬의 비교가 더 중요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대중음악의 주류는 그런 음악들이다. 단지 그런 가운데 남들이 하지 못하는 고음의 기술들이 마치 곡예처럼 선호되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문득 드는 생각이다. 너무 높은 고음은 피곤하다. 늙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