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끝날지 알기 때문이다. 무려 30년 전부터 결말을 알고 있었다. 아마 그때였다면 오히려 더 즐겁게 기대하며 보았을 것이다. 확실히 지친 것을 느낀다. 삶은 고단하고 현실은 지난하다. 허구에서마저 현실과 같은 아픔과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 해피엔드가 좋다. 배드엔드는 이젠 너무 피곤하다.
그래서 미루고 있었다. 드디어 선라이즈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보지 말아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다. 이미 너무 늦었다. 어차피 원작부터가 정사로 여겨지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역습의 샤아'가 아닌 토미노 요시유키의 소설 '벨토치카 칠드런'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니 설정이나 이야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다. 더구나 바로 '역습의 샤아' 뒷시대를 배경으로 '건담 유니콘'까지 제작되며 설정충돌까지 우려되고 있다. 아무리 돈이 좋기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일까. 하긴 그놈의 돈 때문에 세계적인 프랜차이즈였을 '스타워즈'도 저 꼬라지가 났다.
아무튼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 하필 '넷플릭스' 추천애니메이션에 올라온 바람에 술김에 무심코 클릭했다가 30년만에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작품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감상은 화장실 갔다가 손만 닦고 나온 느낌이다. 결정적인 전투가 없었다.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액션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하사웨이가 마프티로 신분을 위장하고 테러활동을 하고 있을 텐데 그 사실을 이놈이나 저놈이나 죄다 알고 있는 것 같은 점이 김빠지게 만들었다. 무언가 정체를 감추고 활약하는 만큼 언제 정체를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긴장감에 옭죄는 느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다. 그럴 거면 그냥 극장판 한 편으로 끝내 버리던가.
애니메이션 기술은 확실히 이전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이 발전했다.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감탄하며 보게 되는 장면이 제법 되었다. 하지만 그 뿐. 건담이라는 프랜차이즈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거대서사의 완결성과 미학에서 기대에 많이 미치지 못함을 아쉬워하게 된다. 다만 흥미롭다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무력항쟁을 단순히 테러로 폄하하던 일본의 입장에서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정의를 실현하고자 테러리즘에 나서는 주인공을 묘사한다는 그 아이러니가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과연 일본인의 입장에서 하사웨이의 테러리즘은 단순한 폭력이며 악인가, 아니면 정의를 위한 투쟁인가.
뉴타입이었을 것이다. 90년대 초반 일본 애니를 즐겨보던 이들에게 거의 성전과 같던 잡지였다. 거기에 '섬광의 하사웨이'와 '크시 건담'이 소개된 것을 보았었다. '하이텔'을 통해 번역본도 보았었다. 토미노 영감은 변태가 맞다. 그게 벌써 30년도 더 된 일이다.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때 보았었다면. 너무 늦은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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