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적 놀이에서 이기든 지든 바로 다음 게임에서 모든 것은 초기화되었다. 그냥 한 번의 게임에서 이기고 지는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다음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는 했었다. 졌으면 다음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 이겼다면 다음 게임에서 다시 이기기 위해서. 그러나 게임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재조정이 필요했다. 어느 한 사람, 혹은 어느 한 쪽 만 계속 이겨서는 게임이 성립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게임의 사이사이 게임의 룰에 대한 재조정이 이루어졌다. 팀의 구성을 바꾸거나, 아니면 게임의 룰에 조정을 하거나.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의 게임에는 그런 타협이나 조정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럴 권한 자체가 대부분 게임 참가자들에게주어지지 않았다. 어른과 아이의 차이다. 아이들은 얼마든지 자기들끼리 게임의 룰을 바꿀 수 있었지만 어른들은 아니었다. 어른들은 이미 존재하는 게임의 룰 안에 종속된 한 마리 말에 지나지 않았다. 어렸을 적에는 그렇게 즐겁기만 하던 게임들이 어느새 삶과 죽음을 가르는 살벌한 규칙으로 바뀌게 된 이유였다. 어렸을 적 경쟁에서 승리했어도 바로 다음 게임에서 다른 룰로 다시 경쟁해야 하는 위치에 서게 될 테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아니었다. 누군가는 대기업의 창업자가 될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없는 노숙자가 되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벌써 200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우연히 군대 고참인 듯 보이는 사람이 노숙자 차림으로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을 보았었다. 과연 그 사람이 실제 내가 기억하는 그 고참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닮은 그 사람이 쓰레기통을 뒤지며 내 앞을 지나갔을 때 나는 한 마디 말도 건넬 수 없었다. 내게 그리 잘해 준 고참이었는데. 어른의 경쟁이란 것이다. 현실의 엄혹함이고 냉정함인 것이다. 그래서 패자가 되면 가족까지 집도 절도 없는 노숙자 신세가 된다. 승자가 되면 드라마에서처럼 막대한 돈과 함께 평온하고 호화로운 삶을 손에 넣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 내가 개입할 여지란 아예 없다시피 하다.
기득권이 왜 기득권인가. 권력의 권權은 저울의 권이다. 규범이다. 가치다. 그런 것들을 정의할 수 있는 위치이며 권한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승자가 되는가. 무엇이 그들을 패자로 만드는가. 어느때는 싸움만 잘하면, 어떤 때는 그저 고전만 잘 외우면, 어떤 때는 남을 잘 속이고 잘 죽일 수 있으면, 결국은 권력자가 원하는 답을 가장 근사치로 보여 줄 수 있는 이가 승자가 되는 것이다. 왜 나는 패자이고 저들은 승자인가. 그렇게 룰을 만들었으니까. 그렇게 게임을 고안했을 테니까. 마치 유희처럼 그 룰을 만든 당사자들은 멀리서 그 악다구니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어째서 '오징어게임'인가.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릴 적 그저 아무렇지 않게 즐기던 게임들이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규칙이 되어 가는가. 놀이가 아니다. 참가자들도 아니다. 그렇게 룰을 만든 당사자들이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승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고, 누군가는 패자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자신의 의지다. 어릴 적에는 모두가 평등했지만 어느새 서울대와 고졸 노동자처럼 현실은 그들을 엄격하게 가르고 나누게 된다. 그 안에서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산 자와 죽은 자가 갈린다. 살아남았으니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무의식적으로 아는 것이다. 오징어게임은 바로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이다. 데스서바이벌이란 우리들이 살아가는 승자독식의 현실의 반영인 것이다. 룰을 만드는 놈들이 보상까지 정한다. 그 보상을 내걸고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악다구니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싸우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참가자 자신들이다. 그들 자신도 너무나 변변치 않은 하찮은 주제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알량한 승리를 위해 그들은 기꺼이 상대를 배신하고 적대한다. 그리고 그런 필사적인 관계가 룰을 만든 주체들의 단순한 쾌락으로 이어진다. 고작 455억따위. 누군가에게는 크고 누군가에게는 적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고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외부에 기고할 때는 여러 이유로 하지 못할 말들이다. 성기훈이 오징어게임을 하고 그리고 승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패자가 되어 스러져야 하는 이유다. 마지작에 성기훈이 상대하게 되는 조상우가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대이자 엘리트의 산실인 서울대 출신으로 설정된 이유이기도 하다. 타인을 두고보지 못해 하류인생으로 전락한 성기훈과 더 높은 곳을 바라보다 범죄자의 길로 들어선 조상우가 마지막 게임에서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더 인기인 것인가. 낯설고 당황스럽기만 하다. 한국드라마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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