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40대라는 말을 듣고 바로 납득해 버렸다. 아마 젊은 나이라도 오래전 영화나 소설들을 즐겨보던 이였을 것이다. 그만큼 그리운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지금은 안다. 정보원이라는 것도 결국은 월급쟁이들이다. 영화나 소설에서 묘사되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정보원이라는 건 그냥 창작물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도청기 설치하다가 외교관들에 바로 걸려서 국제망신당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게 바로 현실의 정보조직들이란 것이다.
하지만 특히 냉전시기 그런 로망이 있었다. 전세계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물밑에서 치열하게 전쟁과도 같은 갈등과 경쟁을 이어가던 시기 그 첨병에 있던 첩보원들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이 생겨났다. 사실 일본의 닌자에 대한 판타지도 그런 첩보원들에 대한 환상의 영향을 받아 새로 덧칠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할 수 있다. 현대의 스파이들에 대해 가지는 환상들이 과거의 스파이라 할 수 있는 닌자에게까지 덧씌워진다.
적지까지도 마음대로 누비는 만큼 첩보원들에게는 남다른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솜씨로 다른 사람으로 변장하고,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전투능력도 가지고 있다. 그런 판타지를 세상에 퍼뜨리고 더욱 구체화시킨 인물이 바로 007시리즈의 작가인 이언 플레밍이었다. 사실 이후의 대부분 첩보물들은 007의 아류라 해도 좋을 정도로 그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지금도 여전하다.
오프닝부터 이 작품이 추구하는 바를 바로 보여주고 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오래된 미국만화의 분위기다. 미국의 스파이 만화의 분위기의 오프닝을 통해 이 만화가 지향하는 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 쉽게 보여준다. 그리고 실제 만화의 배경도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의 동서독을 모티브로 한 듯한 가상의 국가다. 그래서 여러가지 그리운 듯한 요소들이 보인다.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그것을 유쾌하게 비틀므로써 그 시대를 기억하는 이들의 향수와 새로운 쾌감을 자극한다.
정체를 감춘 스파이의 가족이란 역시 오랜 소재다. 정체를 감춘 스파이들이 우연히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는 이야기 또한 꽤나 흔하다. 평범 이하를 가장한 암살자라든가, 비밀스런 실험에 의해 태어난 초능력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만큼 긴 세월이 흐르며 곰삭은 탓일까? 그런 모든 특별한 요소들이 모여서 하나의 유쾌한 일상을 이룬다.
물론 처음은 아니다. 1980년대 방영된 한국제목 '미녀첩보원' 역시 두 아이를 기르는 이혼녀를 주인공으로 주변의 일상과 스파이활동이라는 상반된 요소들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작품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아예 스파이라는 것을 이들 특별한 가족을 위한 하나의 서술처럼 만들어 버린다. 한 사람은 스파이로, 한 사람은 살인청부업자로, 한 사람은 초능력자로, 원래 완전한 타인이었던 그들이 하나의 가족을 이루는 이유로써 스파이라고 하는 요소를 차용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그를 배경으로 삼은 일상의 코미디가 이어진다.
스파이일 뿐 아빠다. 살인청부업자일 뿐 엄마다. 초능력자일 뿐 딸이다. 원래 타인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가족이다. 하지만 그런 거리들이, 그런 특별함이 그들의 일상을 또한 평범하면서 특별하게 만든다. 그런 일상의 관계들이 특별하면서 평범하게 만든다. 아마 오래전 드라마에 대해 쓰면서 이야기한 바 있을 것이다. 일상성과 특수성. 그 완벽한 조화가 바로 이 작품이 인기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요즘 유일하게 기다리며 보는 작품이 되었다. 토요일에는 그래서 세상 없어도 무조건 술을 마셔야 한다. 술 없이 넷플릭스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냐가 귀엽고, 요르가 멋지고, 로이드가 사랑스럽다. 그 일상들이 유쾌하면서 현실에도 여유를 돌려준다. 익숙해서 그립기까지 한 여러 요소들과 너무 당연해서 스며드는 일상의 이야기들이 너무 절묘하다.
인기있는 건 다 그 이유가 있다. 다만 동의하느냐 동의하지 못하느냐. 그런 점에서 절대 취향저격이라 할 수 있다. 오랜만에 일본어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오래지만 새롭다. 새롭지만 오래다. 참 즐거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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