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에는 시나리오가 필요없다"
둠과 퀘이크를 만들 당시 파트너였던 존 로메로와 결별하면서 존 카멕이 한 말이었다. FPS게임에 그렇게 복잡하고 정교하고 깊은 의미까지 부여한 스토리와 설정이라는 것이 과연 필요한가. 중요한 것은 게임플레이이고 그를 구현하기 위한 기술이다. 시나리오는 단지 그를 위해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 포르노라는 것은 시청자의 성욕을 대리충족할 수 있도록 성행위를 묘사해 보여주면 그 뿐, 시나리오는 그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결국 존 카멕도 망했잖아?
아마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텐데 원래 테트리스에도 그 배경이 되는 설정과 스토리가 존재한다. 오락실에서 하던 땅따먹기도 역시 마찬가지다. 벽돌깨기도 제작자마다 배경스토리가 다르고, 그래서 게임에 등장하는 배경이나 오브젝트, 그리고 게임을 진행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다만 그 배경이 되는 스토리라는 것은 벽돌깨기라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유를, 그러니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화면 속에서 캐릭터와 요소들을 조작하고 상호관계하며 게임을 진행해나가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존재할 뿐이기에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몰라도 상관없는 것이기는 했다. 한 마디로 소닉의 배경스토리따위 몰라도 소닉을 즐기는데는 크게 문제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래전 정식으로 수입되는 게임도 몇 없던 시절 번역도 안된 외국산 게임을 별 무리없이 즐길 수 있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스토리나 설정따위 몰라도 게임은 얼마든지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면서 처음 떠올린 것이 그래서 예전 세가에서 나왔던 '스페이스 채널'이라는 게임이었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게임이었는데 어이없게도 그 춤을 통해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을 퇴치한다는 설정이었을 것이다. 사실 음악게임 가운데 그런 것들이 적지 않았다. 나오는 음악에 맞춰서 정확히 입력하면 그를 통해서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을 물리치고 사악한 악마를 몰아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전통의 무속과 절묘하게 만났다.
원래 음악에는 신령한 힘이 있다 여겨졌었다. 그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아서 음악이란 최초 개인의 정서보다는 집단의 의지를 의식으로써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지금도 원시부족에서 음악이란 집단의 의식을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신과 소통하고 정령을 불러내고 악귀를 물리친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인간의 행위가 춤으로써 표현된다. 그래서 심지어 불경조차도 우리나라에서는 독송할 때 마치 노래처럼 리듬을 붙여서 외우기까지 한다. 아마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그런 이유로 스님들 가운데 독경을 잘하는 분이 있으면 그를 추앙하여 모이는 신자들까지 상당했을 정도였다. 당연하게 무당이 굿을 할 때도 북과 징과 꽹과리와 장구가 동원되고, 그 가운데서 무당은 춤을 추고 무가를 읊는다. 영화 파묘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할 것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이야기가 있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했을 테지만 KPOP이라는 주제가 정해지면서 이야기는 KPOP이라는 주인공을 따라 전개된다. 뮤지컬을 만들 때 가장 흔히 쓰는 방식은 당연하게 중심이 되는 줄거리에 맞춰 그에 맞는 노래를 만드는 것일 터다. 하지만 때로는 노래가 주제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은 경우 노래에 맞춰 줄거리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영화 '맘마미아'가 그런 예일 것이고, 애니메이션 '겨울왕국'도 'Let it go'가 먼저 나오고 줄거리까지 수정한 경우였었다. 그래서 이야기가 단순해진 것이었다. KPOP이라는 요소를 주제로 삼고 중심에 놓으면서 그를 최대한 살릴 수 있도록 간결하고 단순한, 어쩌면 클리셰로 범벅이 된 이야기를 그 아래에 깔아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단순한 이야기들을 제작진이 선택한 최고의 노래들이 화려하게 장식함으로써 특별함을 부여한다.
애니메이션에서 실제 OST로 쓰인 KPOP노래들을 빼고서 이야기를 감상해보면 바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줄거리도 캐릭터도 전혀 특별할 것이 없지만 그러나 적절하게 정교하게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쓰인 - 정확히는 그를 중심으로 조화롭게 짜여진 구성과 구조들이 자칫 평범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더욱 특별한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다.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뜻이다. 이야기가 쓸데없이 정교하고 치밀하고 방대했다면 OST로 쓰인 노래들은 때로 쉽게 잘리고 찢기고 부서진 채 들려졌을 것이다. 이야기가 OST를 잡아먹는다. 매우 흔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야기가 단순하고 간결해지면서 주제가 되는 KPOP들이 더욱 치밀하게 설득력있게 관객들에 전해지게 된다. 음악 자체도 훌륭하지만 그런 음악들이 나오게 되는 배경이나 상황들이 더욱 그런 음악들을 치밀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런 음악들이 나오는 장면마저도 KPOP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정교하게 잘 구성해서 보여준다.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말 그대로 그냥 이건 한 편의 뮤직비디오, 하나의 앨범 전체를 보여주기 위한 스토리가 있는 뮤직비디오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뮤직비디오 속에서 아티스트들은 더욱 매력적으로 빛나 보이고 있기까지 하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본 관객들이 지금도 등장인물들의 팬이 되어 팬으로서의 역할극에 몰두해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저 한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로서가 아닌, 영화의 OST를 실제 공연하며 불렀던 아티스트로서도 관객들에 각인된 때문이다. 화려하기까지 하다. 더욱 저연령 관객들의 경우에는 그런 단순한 구조를 통해서 쉽게 이야기를 이해하면서 주인공들의 무대에도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매우 정교하게 계산된 구성이고 연출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런 모든 것은 실제 아티스트들이 고심해서 써내고 물렀던 빼어난 음악들과 캐릭터디자인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지만. 그것이면 된다. 오래전부터 주장해 온 바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캐릭터, 매력적인 캐릭터 하나만 있으면 이야기같은 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무튼 그래서 존 카멕의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특정한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노골적인 시도를 두로 포르노라 빗대 부르기 시작한 것은. 많은 신인과 아마추어들이 실수하는 바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교하고 방대한 설정이나 치밀한 이야기같은 것이 아니다. 실제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체험 그 자체다. 그런 점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선택과 집중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최고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 주제이고, 무엇이 중심이 될 것인가. 무엇을 통해 관객에게 자신들이 의도한 최고의 경험을 선사할 것인가. 그 결과다. 단순한 게 쉬운 게 아니다. 간결할수록 더욱 어렵다. 새삼 깨닫는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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