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이효리에 대한 어떤 증오들...

까칠부 2010. 7. 1. 20:14

선생님이 학생을 야단친다.

 

"잘못했지?"

"잘못했어? 안 했어?"

 

마침내 학생이 인정한다.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데?"

"표절이요..."

 

자 그러면 여기서 선생님은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내 학창시절 경험에 비추면 그런다.

 

"이 새끼, 아는 새끼가 그래?"

"죽어! 죽어! 이 쓰레기 새끼야!"

"너같은 새끼는 사회의 해악일 뿐이야!"

"그래도 너같은 걸 낳고 미역국을..."

 

솔직히 그래서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잘못을 저지르고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한 번 찍힌 낙인은 영원히 계속될 뿐이다.

 

그러나 그리 좋아하는 상식은 말한다.

 

"잘못을 인정하는 거니?"

"예..."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지?"

"네..."

"일단 열 대 맞고 반성문 써와라. 그리고 다시는 그러면 안 돼!"

"네..."

"약속할 수있지?"

"네..."

 

더 때릴 일 있으면 나중에 다시 잘못을 저지르면 그러던가.

 

법이 개인을 처벌하는 이유도 같다. 정상참작이라는 게 그래서 있다. 죄를 저질렀어도 반성하고 다시는 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 같다. 법이든 도덕이든 사람을 버려서 법이든 도덕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이미 표절을 하고도 당당히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여전히 인정도 않고 많은 이익을 누리고 있다. 반면 이효리는 표절사실을 인정한 것만으로도 큰 타격이다. 여전히 버티는 사람들과 사실을 인정하고 나름의 반성과 조치를 취한 사람과, 그런데 사실을 인정했으니 아예 매장한다. 형평성이 있는가.

 

아니 나아가 과연 이효리가 사실을 인정하고서 매장당했는데 누가 과연 앞으로 사실을 인정하고 바로잡으려 할까. 그냥 한 순간 이미지 망하고 마는 게 아니다. 아예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이다.

 

관용이 필요한 것은 관용이 인간을 솔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관용이야 말로 인간을 양심에 솔직하게 만든다. 사회가 정직해지는 것은 관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은 단지 본보기를 보이자는 것 뿐이라. 한 마디로 증오다. 그 이유야 어찌되었거나 증오에 불과하다고 본다. 일벌백계? 그런 말이 나오는 자체가 증오의 한 형태다.

 

물론 이효리에게도 자숙의 시간이 필요하기는 하다. 일단 반성하는 제스쳐를 더 보여줄 필요가 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다짐도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예능출연은 경솔한 감이 없잖아 있다. 그렇더라도 과연 이것이 이효리라는 한 인간을 매장할 일인가.

 

오히려 정직하지 않아 멀쩡하고, 그래도 솔직할 수 있어서 매장당하고... 왜 우리 사회가 이 모양이 되고 있는가. 학교 다닐 때도 배웠다. 정직하면 손해본다. 어떤 경우든.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실수할 때란 것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일일이 매장하고 할까?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 지금의 응징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다. 너무 지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