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음악들

시나위 - 크게 라디오를 켜고...

까칠부 2010. 8. 22.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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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라디오를 켜고 - 시나위

피곤이 몰아치는 기나긴 오후 지나
집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어떠한가
지하철 기다리며 들리는 음악은
지루한 하루건너 내일을 생각하네
대문을 활짝열고 노래를 불러보니
어느새 피곤마저 사라져 버렸네
크게 라디오를 켜고 다함께 따라해요
크게 라디오를 켜고 다함께 노래해요

두눈을 감고서는 감들려 했을때
옆집서 들려오는 조그만 음악소리
소리를 듣고싶어 라디오 켜보니
뜨거운 리듬속에 마음을 뺐겼네
자리에 일어나서 노래를 불러보니
어느새 시간마저 지나가 버렸네
크게 라디오를 켜고 다함께 따라해요
크게 라디오를 켜고 다함께 노래해요
크게 라디오를 켜고 다함께 따라해요
크게 라디오를 켜고 다함께 노래해요

아침을 알려주는 자명종 소리마져
쌓여진 졸음만은 어쩔수 없어라
두손에 잡혀지는 라디오 켜보고
하품과 기지개를 마음껏 해보세

가사 출처 : Daum뮤직

 

 

참 전설적인 앨범이다. 일주일동안 준비해서 단 사흘만에 녹음. 무려 보컬은 감기에 걸려 있었다.

 

언더그라운드 밴드가 앨범을 내고 데뷔하기가 그리 꿈만 같던 시절이었다. 지금같이 인디레이블이 있거나 한 것이 아니어서, 그렇다고 직접 시디를 구워 팔 수 있는 시스템도 되어 있지 않았기에, LP를 찍어낼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을 유통해 팔 수 있는 음반사로부터의 컨택은 필수였다. 하지만 밴드음악의 불모지에서 아직 검증되지 않은 언더그라운드 밴드가 그같은 기회를 잡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우연찮게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시나위의 멤버는 리더이자 기타 신대철에 보컬 임재범, 베이스 박영배, 드럼 강종수, 키보드에 김형준. 원래는 고등학교 스쿨밴드로 시작했다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1집 당시 확정되어 있던 멤버였다. 물론 이 멤버 가운데 2집에서도 함께 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멤버교체로 따지면 거의 세계적인 기록을 갖고 있는 것이 시나위다.

 

바로 직전 강기영 - 지금은 달파란 - 도 베이스로 참가하고 있었다는데 역시나 1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신대철과 무슨 일로 한 바탕 하고서 나갔다고 하고, 특히 임재범과 신대철이 만난 이야기가 재미있다.

 

신대철이 아마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버지 신중현씨의 클럽에서 연주를 하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어느날 임재범이 찾아와서 노래를 부르는데 말 그대로 작살이었단다. 이전까지 한 번도 밴드 경력이 없던 임재범이 시나위를 노리고 오디션 아닌 오디션을 보려 신중현씨의 "록월드"를 찾았던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신대철과는 동기동창이었다고. 김종서나 김태원의 증언처럼 신대철은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또래들 사이에서 스타였기 때문에 그 신대철을 동경해서 록월드를 찾은 것이었다고 한다.

 

여기서 또 재미있는 것이 원래는 신대철이 생각하고 있던 것이 부활의 보컬인 김종서였다고 한다. 부활 안에서도 여러가지 일들이 있어 - 특히 매니저와의 관계로 인해 흔들리고 있던 김종서는 시나위의 제안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김종서가 부활을 나왔을 때는 이미 임재범이 시나위의 보컬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결국 부활마저 그만두고 갈 곳을 잃은 김종서는 이근형이 이끌고 있던 작은하늘에 합류하고, 거기서 자신이 몸담고 있었고 몸담을 뻔 했던 부활과 시나위의 첫앨범 발매를 지켜보게 된다. 참 여러가지로 꼬였달까?

 

 

 

 

어쨌거나 아마 킹레코드였지? 아버지의 영향으로 록월드 등 언더그라운드에서 커버곡으로 라이브활동을 하면서도 메이저 데뷔를 목표로 곡작업도 꾸준히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쓴 곡이 원래 시나위의 보컬이던 주준석을 추모하며 만든 "그대 바람 앞에 촛불이어라"와 "남사당패"였다. 하지만 아직 곡도 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킹레코드사에서 제의가 왔고 흔치 않은 기회라 놓칠 수 없었던 신대철은 덜컥 그것을 받아들이고 만다. 주어진 시간은 준비기간 1주일, 녹은 3일.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아직 전혀 검증되지 않은 언더그라운드 밴드에 킹레코드사가 할애할 수 있는 시간과 비용은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조차도 사실 킹레코드사 입장에서는 도박이나 다름아니었다. 과연 언더그라운드 출신의, 그것도 메탈 밴드의 음반이 성공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더라도 당시 임재범은 감기몸살에 걸려 있던 중이었다는 거다. 이 목소리가 바로 감기몸살에 걸린 당시 임재범의 목소리다. 더구나 녹음 도중 임재범에게는 입영영장까지 나왔다. 녹음 마치고 앨범 내고 거의 바로 입대했다고 보면 된다. 2집에서 김종서를 다시 보컬로 맞아들인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던 셈.

 

그러나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신대철은 놀라운 천재성을 발휘하며 마침내 국내 첫 헤비메탈 음반인 시나위 1집 Heavy Metal Sinawe를 발표하게 된다. 그 완성도란 일주일 동안 준비해 사흘만에 녹음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감기몸살에 걸린 임재범의 목소리 또한 이제까지 우리나라에 없던 것이었다. 모든 것이 국내최초였던, 이제까지 없었던 음반이었다. 그리고 그 첫음반은 말 그대로 대박이 나게 된다.

 

1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비공식적으로는 30만장은 넘었을 것이라 한다. 내가 산 카세트 테이프까지 포함하면 더 나갔을 것이다. 원래 음반판매집계에서는 카세트테이프는 치지 않으니. 아쉽게도.

 

물론 지금 관점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사운드였다. 시나위 앨범을 처음 들은 누군가 듣자마자 그러더라.

 

"MP3로 녹음해도 이것보다는 낫겠다."

말 그대로였다. 당시 녹음설비라는 게 다른 게 없었다. 그냥 녹음하는 게 전부였다. 음질도 좋지 않았다. 더구나 악기별로 녹음해 하나로 믹스한다거나, 부분부분 녹음해 따서 이어 붙인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 모든 게 한 방이었다. 말이 앨범이지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라이브앨범이라 보면 되었다.

 

그것은 비단 시나위만의 문제가 아니어서 다른 밴드의 음반 역시 사정은 거의 매일반이었다. 그나마 부활이나 시나위, 백두산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고, 다른 밴드 가운데는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수준의 음반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밴드음악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주로 음반이나 라디오로 음악을 듣는데 그 수준이 그 모양이면.

 

부활의 경우는 그나마 더 심했다. 킹레코드사가 대박을 터뜨리는 것을 보고 언더그라운드에서 시나위에 버금가는 이름을 얻고 있던 부활에 서울음반에서 연락해 왔다. 당연히 매니저 백강기는 서울음반의 제의를 수락하고. 그리고 부활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틀. 녹음에 쓰인 시간이 6프로, 대략 18시간 정도다. 그나마도 한 번에 녹음 못 끝냈다고 김태원이며 이승철이며 그렇게 쪼인트를 까였다니.

 

부활 1집이 그리 산만한 것은 그래서다. 그나마 시나위는 메이저데뷔를 대비한 준비라도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그러나 부활은 그런 자체가 없었다. 그 무렵 베이스를 치던 이태윤이 나가고, 보컬이던 김종서가 나가며 이승철이 들어오고, 그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시간까지 얼마 주어지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앨범작업이란 무리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썼다는 "비와 당신의 이야기"를 필두로, 강변가요제 출전곡이던 "너뿐이야" 양홍섭에게서 받아온 전형적인 가요 "희야" 여기에 어딘가 삽입곡으로 쓰였다는 "사랑의 흔적" 등 일관성 없이 거의 채워넣기식으로 곡들이 배치되고 있었다. 2집의 완고한 짜임새에 비해 1집의 허술한 산만함이란 바로 그런 결과다. 부활의 음반 가운데 가장 앨범으로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 그래서 부활 1집 Rock will Never Die였다.

 

어쨌거나 시나위의 성공은 부활의 데뷔를 이끌어냈고, 백두산을 메이저로 불러냈다. 블랙신드롬, H2O, 작은 하늘 등 다른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이 음반을 내고 데뷔하는 돌파구가 되어 주었다. 더불어 해외 메탈음악에만 빠져 있던 국내 메탈마니아들에게도 국내 대중음악을 듣도록 만들었다. 80년대 중후반 락의 전성기는 바로 이 앨범으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내 첫 메탈음반이면서도 본격적으로 메탈 사운드를 들려주던 이 음반으로써.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말도 안 되는 일들 뿐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것도 가능하던 시절이라. 인세만 제대로 배분되었어도 신대철은 이 한 장의 앨범만으로도 대박을 내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시나위도 돈 때문에라도 원년멤버 그대로 그렇게 잦은 멤버교체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워낙 돈이 되지 않으니.

 

나로 하여금 시나위에 빠져들게 만든 앨범이었다. 크게 라디오를 켜고. 실제로 크게 라디오를 켜고서 그 노래를 따라불렀다. 있는대로 목을 긁으며. 과연 이같은 목소리가 우리나라에서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 앨범의 또 하나의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임재범의 발굴이라는. 임재범의 목소리는 그만큼 특별하다. 그는 우리나라의 보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마 앞으로도.

 

당시 나의 일상이었다. 아니 모든 젊은 에너지들의 일상일 것이다. 넘쳐나는 에너지와 그러나 그것을 발산할 길 없는 무료한 나날들. 그것을 깨뜨리고자 하는 파격이. 바로 그래서 메탈 아니던가. 임재범의 거칠지만 후련한 목소리와 나의 이야기를 대신해 주는 듯한 가사. 참고로 가사는 강종수가 썼다. 록이란 원래 그렇게 주관적인 자기 이야기 - 나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내가 시나위에 빠져든 이유이기도 하다. 이건 내 이야기다.

 

사연을 떠올리며 들어보기 바란다. 신대철과 강기영이 이미 준비기간 동안 싸우고 찢어졌다. 박영배는 급히 영입되었고. 임재범은 감기몸살에. 더구나 입영영장까지. 일주일의 준비기간과 사흘의 녹음. 그래도 이만한 사운드가 완성되었다. 신대철이 천재라는 이유다. 이제는 알아주는 사람도 얼마 없지만.

 

음악은 시간을 머금고 때가 되면 돌려주는 은행과 같다. 지나온 시간만큼 기억에는 그리움이라는 이자가 붙는다. 아련함이 그래서 좋다. 음악이 좋은 이유다.

 

지금도 생각나는 앨범.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나의 한 시절을 지배했던. 전설. 그 자체. 아마도.

 

시나위가 다시 앨범을 내기를. 추억만이 아닌 현재로써. 시나위의 10집을 기대해 본다. 반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