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음악들

티삼스 - 매일매일기다려...

까칠부 2010. 9. 5.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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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기다려

어둡고 탁한 나의 창에
비 내리는 밤에 우산을 쓰고 찾아와
세상에 제일 아름다운 미소로
나를 재우고 떠나버렸나

구름이 개어 북두칠성 반짝이는 밤엔
하늘을 보며 걸었어
이 밤도 그대 나에게로 돌아와 준다면
영원한 여행을 떠날 거야
그대 나를 나를 잊었나
그대 나를 진정 별이 뜨는 오늘밤도
비가 내리는 밤도 매일매일 기다려
그대 나를 나를 잊었나
그대 나를 진정 별이 뜨는 오늘밤도
비가 비가 내리는 밤도
매일매일 기다려

 

 

내 아직 덜 여문 젊음을 말 그대로 불사르게 했던 노래다. 아마 내 또래 가운데 그런 사람 많지 않을까? 이윤석도 하모니 오디션에서 이 노래 부르고 있더라.

 

말 그대로 센세이션이었다. 역시 노래는 보컬이다. 이제까지의 그 누구와도 다른 김화수의 후련한 샤우팅은 한 순간에 듣는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아 버렸다. 아, 록은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게 메탈이다.

 

물론 지금 들어보면 참 심심하다. 메탈치고는 연주의 비중이 작다. 당시 시대적 한계도 있지만 보컬에 너무 치중된 사운드는 뭐랄까 메탈이라기에는 한참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더라도 공간을 가득 채우며 울려는 김화수의 보컬은 과연 탁월하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가.

 

87년이었을 것이다. 강변가요제였다. 솔직히 지금 어느 팀이 어떤 성적을 거두었는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상이 누구였지? 검색해서 찾아봐도 전혀 노래가 떠오르지 않는다. 오로지 기억나는 것은 하나. TV를 보는 순간에도 오로지 이 노래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70년대 말부터 이어져 온 캠퍼스록의 마지막 세대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정수일 것이다. 70년대 중반 대마초파동에 이은 가요계정화운동으로 지하에서 올라오던 언더그라운드 록그룹들이 철퇴를 맞고 뿔뿔이 흩어졌을 때 그 바통을 이어 한국 록을 지켜온 것이 바로 캠퍼스록이었다. 포크로부터 이어져 온 록의 정신은 이들 캠퍼스록으로 이어졌고, 미8군무대로부터 비롯된 록의 형식은 이후 조용필과 윤수일로 이어졌으며 들국화로 개화되었다. 그리고 80년대 중반 록의 전성기에도 캠퍼스록은 한국 록의 한 중요한 부분으로써 언더그라운드 록밴드들과 공존하고 있었다. 김종서가 몸담고 있던 검은진주나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블랙홀 역시 그러한 캠퍼스밴드의 하나였다.

 

그러나 당시의 캠퍼스문화란 사실 록과는 거리가 있었고 -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한 번 쓴 바 있다. - 록이 갖는 현장감이라는 것과도 캠퍼스록은 거리가 있었다. 록의 중심은 당연하다는 듯이 캠퍼스록으로부터 언더그라운드로 옮겨기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티삼스는 주류무대에 등장한 마지막 캠퍼스 록밴드라 할 수 있다. 실제 티삼스는 티삼스라은 이름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그대로 흩어지고 있었다.

 

실제 당시 드럼을 치던 채제민이 인터뷰에서도 말한 바 있었다. 그룹 하기 위해서 대학에 갔다고. 무릎팍 도사에서도 이봉원이 개그맨 하려고 대학에 진학했다 말한 적 있을 것이다. 지금에야 먼저 연예인부터 되고서 연예인전형으로 대학에 가고 하지만 당시는 반대였다. 대학에 진학하고서야 비로소 기회가 허락되었던 경우들이 적지 않았던 터라. 그런 불순한 순수함이야 말로 당시 캠퍼스문화의 정수 아니었을까.

 

무한궤도와 다른 부분이다. 무한궤도는 시작부터 서로 다른 대학의 대학생들이 모여 만든 밴드였고, 언더그라운드와도 한 발 걸치고 있던 밴드였다. 그리고 멤버들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을 때 완전히 해체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티삼스야 말로 70년대와 80년대 캠퍼스록의 모습을 간직한 마지막 계승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후로 캠퍼스록이란 주류무대에서 거의 사라지고 있었으니.

 

아무튼 당시로서는 놀라운 음악성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티삼스는 기본적으로 캠퍼스 밴드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의 같은 시기 나온 시나위나, 부활, 백두산, H2O등의 사운드를 들으면 분명해진다. 외인부대, 작은 하늘, 카리스마, 블랙신드롬, 기타등등등... 연주력이 안 된다. 아무래도 대학생이다 보니. 아마추어라는 한계일 것이다. 물론 이 가운데 베이시스트는 신촌블루스에서도 활동한 바 있고, 드러머는 지금 부활에서 드럼을 치고 있고, 김화수야 많은 이들이 꼽는 탁월한 메탈보컬이지만 당시는 그랬다. 그래서 결국 야심차게 내놓은 티삼스의 1집은 "매일매일기다려"의 성공이 무색하게 처참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기타리스트가 에... 최창환이었던가? 정작 매일매일 기다려의 전체 곡과 가사를 쓰고 편곡까지 책임졌던 그는 정작 티삼스 1집에조차 이름을 올리지 못하고 그대로 잊혀지고 말았다 하니. 김화수도 93년엔가 솔로앨범을 하나 냈지만 역시 실패. 베이시스트는 지금 어디서 뭐하는가 모르겠고, 결국 지금 활동하고 있는 것은 드럼을 쳤던 채제민 한 사람 뿐일 것이다. 그조차도 참 뼈를 깎는 노력 끝에 프로로써 자리매김을 했던 것이니.

 

그러고 보면 채제민이 했던 말이 있다. 멤버 가운데 자기가 음악적으로 가장 떨어졌는데 유일하게 혼자서 음악으로 벌어먹고 살고 있다. 다들 재능도 있고 뛰어난 멤버였지만 성공과 재능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뜻일 게다. 아니면 채제민의 지나친 겸손이었거나.

 

또 생각나는 이야기가, 어디 라디오에서였던가? 채제민이 그리 말한 적 있었다.

 

"우리는 부활을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태원이 말하기를,

 

"티삼스는 저 아래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부활보다는 당시 티삼스가 더 유명하지 않았을까. 방송의 힘이란 그렇게 크다. 방송에 한 번 얼굴을 비추고 말고가, 더구나 강변가요제는 당시 한창 화제를 몰고 다니고 있었으니. 강변가요제에서 상을 탔다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음악적인 평가야 별개로 치더라도. 역시 록 마니아들의 평가 역시 별개로 놓더라도.

 

어쨌거나 정말 미친 듯이 불러제꼈던 노래였다. 어디 가면 반드시 불렀던 노래 가운데 하나였다. 샤우팅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마침 백두산의 유현상도 득음을 하며 비슷한 샤우팅을 보여주고 있어서. 남자의 음악은 메탈이고, 메탈은 이렇게 부르는 것이다. 백두산과 티삼스가 비교될 대상은 아니었지만.

 

문득 생각났다. 지금에서야 과연 당시 티삼스 멤버들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인하공전 출신이고, 티자와 삼각자, 스케일자, 이렇게 해서 티삼스라는 것 말고는. 그리고 이 노래 하나. 하지만 이 하나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평생을 살면서 사람들 기억속에 남을 노래 하나만 만들어낼 수 있으면.

 

시간이 지나도 음악은 남는다. 기억과 함께 음악이 남는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기억이 있는 한 잊혀지지 않는 그런 음악들. 더 훌륭한 음악이어서가 아니라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이 있어서이리라.

 

그나저나 확실히 김화수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다른 멤버들은. 부활의 드러머로 더욱 알려지게 된 채제민을 볼 때마다 그것이 조금 아련하다. 좋은 사람들이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하지만 당시 우리나라 록씬이 그럴만한 여력이 안 되어서. 차라리 지금처럼 인디씬이라도 활성화되어 있었으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 안타까움이 더욱 음악을 처절하게 와닿게 하는 것인지도. 지금 와서 다시 듣기에 어쩐지 부족하고 아쉬움이 많지만 그러나 어떤가?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닌 것을. 때로. 좋은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