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자격

남자의 자격 - 무의미한 늘리기였을까?

까칠부 2010. 9. 27. 07:07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런다. 너무 길다. 너무 우리는 것이 아니냐? 지겹다.

 

확실히 그런 감이 없잖아 있다. 무려 8주다. 오디션 2주 반에, 한 달 남짓 간격을 두고 무려 5주째 계속 하모니편만 내보내고 있는 중이다. 장기미션 가운데 하나이던 밴드편조차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점에 비추어 봤을 때 확실히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닌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인가겠지. 늘린 건 늘린 건데 그 늘린 안에 무엇을 채워넣었는가 하는 것일 게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늘어졌다 지겹다 투덜대는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들은 감동이었다 그래도 아쉬워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디선가 멋진 노랫소리가 들려오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묻는다.

 

"누구 노래지?"

 

TV 드라마를 보는데 무척 매력적인 배우가 나온다. 그러면 반사적으로 묻고 만다.

 

"저 사람 누구야?"

 

지난주 실버합창단이 무대에 섰을 때 사람들은 그 분들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어떤 분들이시며 얼마나 무대를 위해 노력들을 하셨을까? 자기의 경험을 투사하기도 하고, 어떤 이미지로써 그분들을 대하려 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그리 누구인가에 관심이 많다. 노래를 들어도, 연기를 보더라도, 책을 읽더라도. 그것이 누구인가. 누구에 의한 것인가.

 

소통인 때문이다. 단지 음악이 아닌, 단지 연기가 아닌, 단지 책이 아닌, 과연 이건 어떤 사람이 어떤 의도로 내게 들려주는 것인가. 누가, 무엇을, 어떻게, 그래서 파파라치라는 것도 있는 것 아니던가.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알고 싶다.

 

그것은 길들여짐이기도 하다. 사막여우가 어린왕자에게 길들여지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가운데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더 많이 공감하게 되고, 그러면서 그와 나를 동일시하게 된다. 마음이 열리며 경계가 사라지는 것이다. 단지 그가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지는 때다. 팬이라 부른다.

 

그것은 단지 연예인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이웃에 대해서일수도 있고, 직장동료에 대해서일수도 있고, 친척에 대해서일수도 있다. 대개는 사랑에 빠질 때 그렇게 된다.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고, 그런 가운데 그리 밉고 싫은 부분까지도 어느샌가 더 좋아하게 되어 버리는.

 

이것은 또한 내가 항상 말하는 자발적 동의와도 통한다. 나는 당신의 노래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당신의 노래에 감동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거리 없이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며 온전히 그 의도하는 바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제서야 대상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을 아마 제작자들도 안다. 작가들도 안다. 그래서 어떻게 대중에 다가갈 것인가. 만화를 보더라도 소소한 이야기들이 초반을 채운다. 소설을 보더라도 그의 일상들이 그의 성격을 묘사해준다. 그는 어떤 사람인가. 평소 그가 먹는 것, 그가 입는 것, 그가 하는 행동들, 그의 사소한 버릇들까지. 그러면서 그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이런 사람으로 앞으로 이런 행동을 할 것이다. 대중에 동의를 구하게 된다. 대중을 길들이려 한다.

 

그것은 마치 소개팅에서 서로의 만남을 주선하는 것과도 같다. 그는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이런 좋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런 훌륭한 멋진 사람입니다. 생산자는 그렇게 소개를 하고 소비자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더 알고 싶어하고 더 이해하고 싶어하고. 열광적인 대중문화의 팬이란 그렇게 만들어진다. 얼마나 그것이 디테일하고 구체적인가. 그것이 얼마나 대중의 이해에 접근하는가.

 

만일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남자의 자격이 4주 분량으로 끝났다 치자. 과연 4주만에 끝나고 난 남자의 자격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함께 눈물을 흘리며 감동받고 했을까? 선우가 눈물을 참지 못해 했을 때, 최재림이 끝내 객석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멤버들이 모두 대기실에 모여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을때, 과연 단지 모여서 연습을 하고 대회에 나가 상을 타고, 그같은 감동이 있었겠는가 말이다.

 

남자의 자격은 예능이다. 음악프로그램이 아니다. 기획사는 더더욱 아니다. 합창을 해서 대회에 나가 상을 탄다.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예능이 존재하는 이유는 재미를 주기 위해서다. 합창대회에 나가 상을 타기보다 합창대회에 나가 상을 타는 과정에서 시청자들에게 재미를 주기 위해서. 그러면 어찌해야겠는가.

 

단지 가수가 되어 노래만 부르려 해도 라디오며 TV며 출연해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이 노래는 어떤 노래이고, 자기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과정을 통해 데뷔해서 어떻게 지금의 노래를 내놓게 되었는가. 연기를 하더라도 그렇겠지. 어떻게 캐스팅되었고 어떤 과정을 통해서 지금의 작품을 만들어 내놓게 되었는가. 하물며 노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음악이 목적이 아니라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더욱 활짝 열고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도록. 시청자를 프로그램에 길들이는 것이다. 출연자들에 시청자를 길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런 과정을 통해 이렇게 무대에 섰던 것이다. 출연자 하나하나의 모습을. 그들 자신들에 대해서.

 

그것은 물론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고 나이가 몇살이고 하는 개인신상에 대한 것이 아니다. 바로 그 노래에 대해서. 그 노래를 부르는 자신들에 대해서.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노래들에 대해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바로 그 무대에 대해서. 배다해라는 개인이 아니라 합창단원 배다해이고, 선우라는 개인이 아니라 합창단원 선우다. 노래를 부르는 이슬이고, 노래를 위해 연습하는 서두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은 그래서다. 제작진이 아쉬워하는 것도 그래서다. 이런 사람들이 노래를 부른다. 이런 무대일 것이다. 이런 노래일 것이다. 시청자 입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서. 그들이 무대에 서기까지의 이야기들을.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서.

 

함께 눈물을 흘렸더라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이미 공감해 버린 것이다. 그들에 동의해 버린 것이다. 그들의 시간에. 그들의 노력에. 그들의 꿈과 열정에. 마치 내가 그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무한도전도 그렇지 않았던가. 그리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던 모습들을 통해서 무대에 선 그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해하게 되고 링 위의 그들의 모습에 동의하게 된다. 감동은 깊어진다.

 

물론 출연자의 수가 어지간했다면 보다 분량을 줄일 수 있었겠지. 그러나 30명이 넘는 사람들이다. 거의 화면에 잡히지 않은 사람들을 제하더라도 무대에 서고 노래를 부르는 그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그들이 무대에 서기까지의 모습을 보여주자면 이 정도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심지어 나는 따로 특집편성을 해서라도 남자의 자격 "하모니편"의 비하인드 스토리나 미공개영상들을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무대에 서기까지 그들은 더 알고 싶어서.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서.

 

무리수였을까? 하지만 그것이 남자의 자격이었다. 결과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결과에 이르기까지. 주어진 미션을 대하는 남자들의 모습이었다. 주어진 미션에 대하는 전혀 꾸미지 않는 남자들의 자연스런 모습들이었다. 놀라고 당황하고 허둥대고 어물거리는 그런 모습까지 포함한. 남자의 자격이 갖는 진정성이란 그들이 누구인가에 대한 시청자들과의 동의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합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하는가. 합창대회에 나가 무엇을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무대에 오르는가. 그런 과정을 통해 시청자는 더욱 프로그램에 이입하게 되고, 출연자 한 사람 한 사람에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노래가 벅차오르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PD의 조곤조곤한 설명에 어느샌가 그들을 이해해 버렸고 동의해 버린 탓에. 마음이 열리고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 탓에.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더구나 남자의 자격이라면. 지극히 남자의 자격스런 편집 아니었겠는가 말이다. 무리하게 남자의 자격 멤버들을 중심에 넣거나, 단지 엑스트라로 무대에 서는 이들로써 소모하는 것이 아닌. 노래를 부르는 그들 하나하나에 대해서까지 세밀하게 구체적으로 전하는 것은.

 

단지 추구하는 바가 다른 것이다. 합창단원을 모으고 연습하고 대회에 나가 상을 받는 과정까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그 합창단원들이 대체 누구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 무대에 올랐는가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단지 예능일 뿐이며 예능의 출연자일 뿐이라는 사람들과, 그들에 깊이 동의하여 그들을 마치 이웃처럼, 친구처럼, 가족처럼 생각해 버린 사람들과. 이미 사랑에 빠졌다면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안타까워하겠지.

 

아무튼 어제 본 장면 가운데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일 것이다. 무대를 앞두고 배다해가 뒤에서 선우의 허리를 둘러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설레고 떨리고 무섭고 긴장되는 감정들이 그대로 전해지며, 그럼에도 서로 손을 맞잡고 있기에 마음놓이는 그런 마음들도 한결같이 전해지고 있었다. 서재혁의 어깨에 기대 긴장을 달래던 이경규나, 자기도 떨린다며 박슬기를 뒤에서 끌어안아주던 김성민이나, 떨려서 주체할 수 없으면서도 박칼린 선생님이 있어 다행이라는 이윤석이나, 과연 그런 장면들 없이 눈물이란 가당키나 했겠는가 말이다.

 

오히려 부족한. 정말이지 아직 풀어놓지 않은 영상 있으면 더 내놓으라 하고 싶은. 그네들의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더 들려달라고 조르고 싶은. 지나침은 모자름만 못하다 하지만 그리 갈증나고 배고프다. 그조차도 짧다는 것은 과연 나만의 마음일까?

 

석 달 촬영했으니 8주는 길다. 누가 정했을까? 예능에서 한 가지 미션으로 8주는 너무 길다. 4주가 적당하다. 누가 그런 법칙을 만들었을까? 왜 그에 맞춰 만들어야 하며 그에 따라 느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충분했으며 오히려 부족했다. 더 있었으면 하되 약간 모자른 것이 만족감도 높으니까. 다만 언제고 다시 저들을 무대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시 보게 되면 무척 반가우리라.

 

주제는 합창이 아니었다. 합창대회에 나가 어떤 결과를 이루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도전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무대에 서기까지의 이야기었다. 그들 자신의. 그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너무 늘어졌다는 주장도 일견 타당하기는 하지만 프로그램의 성격상, 그 추구하는 바와 맞아떨어지지 않았는가.

 

아직도 여운이 남아 있다. 손을 놓기가 아쉽다. 제대로 길들여져 버린 때문이다. 제대로 프로그램과 사랑에 빠져 버린 때문이다. 그만하면 족하지 않을까? 음악프로그램이 아닌 예능프로그램으로써. 온가족이 함께 보는 시간대의 버라이어티프로그램으로서. 어느새 느림을 이해해 버린 사람들이 주 타겟일 터다.

 

무모하다. 그리고 적절치 못하다. 감동받은 이들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제작진의 판단은 옳았다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제작진의 의도가 그것이라면. 그리고 시청자들이 바라는 것이 그것이라면. 상당히 적절한, 적확한 판단과 결정이 아니었겠는가. 내가 제작진의 결정에 동의하는 이유일 것이다.

 

참 문제다. 이제 어쩌란 말인가. 앞으로 목요일이면 무얼 하는가? 앞으로 일요일이면 넬라 판타지아가 들려올 것 같아 어찌하란 것일까. 잠에서 깨고서도 꿈에서 깨기 싫어 이리 새벽부터 허우적대는 중이다.

 

후유증이 오래 갈 것 같다. 중독이다. 아주 지독스런. 그들은 옳았다. 훌륭했다. 그를 인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