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란 결국 다름일 것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서로 같은데 무슨 하모니가 필요하겠는가?
서로 목소리가 같고, 서로 음역이 같고, 그러면 한 파트를 같이 부르면 된다. 아니 어차피 혼자 부르나 여럿이 부르나, 혼자서 부르고 그것만 여럿으로 겹쳐 녹음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다르니까. 서로가 다르니까. 다르기 때문에 하모니란 필요한 것이다. 그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 그 다름을 이해하는 것. 그 다름으로 하나로 만드는 것.
그렇다고 과연 자기를 버린 하나인가. 그 다름을 버리는 하나인가. 바로 그 다름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이기에 하모니인 것이다. 알토는 알토를, 소프라노는 소프라노를, 테너는 테너를, 베이스는 베이스를, 알토가 소프라노가 될 수도 없고, 테너가 베이스가 되어서도 안 된다. 알토는 알토여야 하고 소프라노는 소프라노여야 하고 테너는 테너여야 한다. 베이스가 빠져서도 안 되고, 소프라노가 빠져서도 안 되고,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모두가 함께.
서로 다른 사람들이다. 전혀 일면식도 없이 모르던 사람들이다. 가수도 있다. 밴드 기타리스트며 베이시스트도 있다. 신인밴드의 보컬도 있었다. 뮤지컬 배우도 있었고, 개그맨도 있었고, 회사원도 있었으며, 격투기 선수까지 있었다. 그 다른 사람들이 언제 얼굴이라도 보았을까?
가장 나이가 많은 50대 이경규에서 20대 초반의 김정혁, 이슬까지. 김정혁의 아버지가 김국진과 동갑이라던가? 이경규가 데뷔했을 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태반이다. 김태원이 데뷔하고 활동한 햇수보다도 어린 멤버마저 있을 정도다. 얼마나 어렵고 어색하겠는가. 서로 살아온 시간도 겪어 온 문화도 다르고. MT가는 버스 안에서 서로 노래를 맞춰보려 해도 아는 노래가 각각이기도 했었다.
성악을 했던 사람과 가요를 했던 사람과 겨우 노래방에나 가 보았던 사람과... 아마 따로따로 불렀다면 누군가는 그야말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훌륭했을 테고, 누군가는 비명소리가 나오도록 형편없었을 것이고. 하지만 그 모든 목소리가 하나가 되었을 때 들려오는 소리는 누가 더 잘하고 못하고 상관없이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누구 하나가 더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그런 어울림 속에서.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함께 모이고, 함께 연습하고,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서로의 넘치는 부분을 나누어갖고. 선생님은 박칼린이나 그 부하 최재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배다해도 선생님이었고 이윤석도 선생님이었으며 서재혁도 이경규에게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연습때 지휘자로부터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가르치고 또 서로에게서 배웠다.
차라리 틀리려면 함께 틀리라. 누군가 혼자 잘하기보다는 모두가 함께 못할 수 있다면. 그리 민망하기만 하던 율동들도 30명이 함께 일사불란하게 보여주니 멋드러진 퍼포먼스가 된다. 그리 못들어줄 노래들도 30명이라는 조화 속에 아름다운 울림으로 들려온다. 누구 하나가 잘해서가 아니라, 어느 하나가 더 잘나서가 아니라, 그 모두에 의해서. 모두가 함께. 그 함께라는 것이.
차라리 혼자서 하던 슈퍼스타K가 쉬웠다. 33명의 합창단원 만큼이나 그들 모두에 대한 책임이 부담으로 짓눌러 온다. 벌써 데뷔한지 30년이 가까워오는 이경규조차 혹시나 틀릴까 두렵고 초조하고 불안하다. 콘서트만 20년 넘게 해 온 김태원이 그리 긴장하는 모습을 10년 넘게만에 처음 보았다더가? 나만이 아니니까. 나만 잘하고 나만 틀리는 것이 아니니까.
나라고 하는 개인이 아니다. 나 혼자이지만 그러나 나로 인해 모두가 영향을 받는다. 유기적인 관계를 알고 그로 인핸 책임을 알고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모자름을 채우고 넘치는 것은 나누고 그렇게 모두의 속에서 자기를 자리매김하는 것.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어야 그 책임의 무게라는 것이 다가올 테지. 과연 자기가 없는데 책임이란 있을까?
한국을 대표하는 합창단 지휘자인 윤학원씨가 박칼린 감독에게 남자의 자격을 높이 평가하며 지지해주고 싶다고 이리 말했었다고 한다.
"이 땅에 아마추어 합창이 더 많아져야 한다. 개개인은 뭐든 혼자서 쉽게 할 수 있어요. 음악이 그렇거든요? 혼자서 농구를 한다거나 시를 읊는다거나 다 할 수 있어요. 사람들이 근래에 현대 사회에서 따로 노는 건 잘하는데 화합을 할 줄 모른다. 합창은 서로 약속을 지켜야 하고, 같이 모여야 하고, 한 명이 빠져서도 화음이 안 빠지고, 인성을 배우는 곳이라 그런 아마추어 합창이 많아지면 사람들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바로 함께 살아가는 지혜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르다. 결코 같을 수 없다. 쌍동이조차도 그리 다르다. 그런데 어떻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가? 첫째는 약속이다. 어느 시간 어느 곳에서 모인다. 그리고 서로 나뉘어진 파트가 있을 것이다. 자기가 맡은 부분. 자기가 책임진 부분. 그것을 지켜가면서. 빠지는 것 없이, 서로 미루거나 하는 것 없이.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며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는 분명히 세우고.
박칼린이 합창연습을 하면서 주문했던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그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러!"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챙기라!"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너무 신경을 쓰다 보면 끝내 자기 목소리를 잃고 만다. 다른 사람 하는 데 따라가느라 자기가 해야 할 부분을 놓쳐 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자기 할 부분만 신경쓰다 보면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가 맞지 않다.
"차라리 틀리려거든 함께 틀리라."
한 사람이 틀리면 그것은 실수지만, 모두가 함께 맞춰 틀리면 그것은 하모니가 된다. 물론 모두가 다 맞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겠지만 그만큼 주위와 조화를 이루라.
노래는 결국 혼자 하는 것이다. 세상이란 결국 혼자 사는 것이다. 아무리 팀이라고, 아무리 팀웤을 강조하나독 결국 그 안에서 그 일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누구에게 미룰 것인가? 누구에게 그 책임을 떠맡길 것인가? 온전히 자기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그러나 함께 하는 것이다. 나 혼자 잘한다고 될까? 나 혼자 잘났다고 될까? 산업이론 가운데 하나다. 산업현장에서 생산효율은 그 현장에서 가장 생산능력이 떨어지는 부분에서 결정한다. 더 많이 더 빨리 더 훌륭하게 생산해내는 부분이 아니다. 아무리 어느 한 부분에서 탁월함을 보이더라도 다른 곳에서 그를 따라가지 못하면 함께 무너지고 만다. 혼자 내달린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되 그러나 주위도 둘러보며. 자기 할 몫에 항상 충실하되 그러나 다른 이들의 몫에 대해서도. 나를 통해 타인을 보고 타인을 통해 나를 보고. 나로써 타인을 이루고 타인으로써 나를 이루고. 그런 만큼 내 안에는 모두가 있고, 모두의 안에 내가 있다. 든든하며 무겁다. 마음이 놓이며 무섭다.
그래서 더욱 긴장하는지도 모른다. 단지 혼자서만 잘한다면. 단지 혼자서만 틀린다면. 혼자서 만족하고 만다면. 아니니까. 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나로 그치는 것이 아니니까. 나 자신에 대해. 나 자신 안에 있는 모두에 대해. 그런 것이 어우러짐 아니겠는가. 하모니 아니겠는가.
합창을 마치고 마침내 펑펑 눈물을 흘린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허탈함에. 서러움에. 아쉬움에. 북받침에. 목소리가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 마음까지 이어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파트를 노래하며 서로의 파트를 듣는 순간 그들의 마음마저 서로에 대해 열린 때문이다. 하나가 되었다.
아니 그것은 비단 합창단만의 것은 아니었다. 객석에 대해서도. 실버합창단의 하모니를 들으며 멤버들이 눈물을 짓고 만 이유. 화면 너머로 그것을 지켜보던 이들마저 눈물을 그렁인 이유. 오늘의 마지막 장면에서 차가운 모니터를 사이에 대고 함께 눈물을 흘리고 만 이유.
김태원은 말한다.
"모니터를 해야 하는데 합창 무대에는 그런 것이 없다. 믿고 가는 수밖에 없다. 아름다운 소리가 전해진다 믿고서 불러야 한다."
그것은 관객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자기에 대한 믿음이며 또한 그것을 듣는 감동에 대한 믿음이다. 객석에서는 무대에 마음을 열고, 무대에서는 객석에 마음을 열고,
"무대 위에서 즐길 수 있어야 관객을 잡을 수 있다."
이경규의 말 또한 같은 맥락이다. 무대란 호흡하는 곳이다. 객석과 함께 호흡하는 것이다. 서로 열고 다가가는 곳이다. 그래서 어느새 노래를 들으며 눈물도 흘리고 감동도 받고 환호하며 박수도 치고.
"우리"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와 너와 우리와 그 우리 너머의 더 큰 우리. 나 혼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과 소통하는 것. 우리이기에 만족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무대에서 더 많은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것. 행위를 하는 것을 넘어 그에 대한 이해와 소통까지도 함께 하는 것.
하모니가 우리에게 전하는 바다. 하모니의 미션이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는 바일 것이다. 많은 이들이 하모니를 통해 감동을 받는 것. 하모니 미션을 보며 눈물까지 흘리며 공감하고 마는 것. 그것이 우리네 삶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기 때문에. 음악이라고 하는 꿈과 더불어 그 음악을 통해 이루어가는 현실의 모습들이. 과연 그런 것들이 아름답다.
음악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아름답다. 단지 음악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어우러짐이 아름답다. 서로 이어진 마음들이. 서로 부둥켜 안고 울 수 있는 그런 마음들이. 서로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부여잡고 달래주는 그런 마음들이. 긴장되어 굳은 것을 서로에게 위로받고 의지하는 그런 마음들이.
그 모든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말,
"사랑합니다!"
긴장을 풀어주려 다정스럽게,
"I 믿 You"
도대체 몇 번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한 것일까. 고맙다 한 것일까. 믿음을 말했던 것일까.
그것은 하나의 꿈이었다. 영화이고 드라마였으며 한 편의 긴 꿈이었다. 한 여름의. 긴 여름을 관통한. 모두의 마음을 관통하여 스민. 그들만큼이나 아마 많은 이들이 그 꿈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교훈들을.
사람들은 누구나 다르다. 모두가 다르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야 한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 어찌할 것인가? 나를 버릴 것인가? 아니면 우리를 버릴 것인가? 그럴 필요 없다. 나도 우리도 하나다. 나도 우리도, 모든 나와 모든 우리들이, 그러나 나이며 우리이며 또한 하나다. 아마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솔직히 그냥 총평까지 감상과 함께 써버리려 했었다. 설마 뭐 있겠는가. 하지만 보는 내내 이건 또 다르구나. 이건 또 특별하구나. 그래서 이렇게. 아마 하나 정도 더 쓰지 않을까? 무려 8주 분량 미션이었으니.
많은 것을 생각케 했던, 많을 것을 느낄 수 있었던 미션이었다. 음악의 아름다움과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하모니와 사람이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 앞으로 넬라 판타지아를 듣게 되면 바로 이들을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남자의 자격 합창단에 대해서. 남자의 자격 합창단 모두를.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긴 여름의 꿈이었다. 차마 깨기 싫어 그 여운을 부여잡아 본다. 깨어남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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