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기억한다. 이후 일본에서 수많은 투견만화가 들어왔지만 개인적으로 어떤 만화도 이 만화 한 편을 이기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겨라 벤!"
내게 풍산개라는 생소한 견종의 이름을 각인시킨 만화였다. 여주인공 꼭지와 주인을 잃은 떠돌이개가 낳은 혼혈견 벤의 우정과 모험을 그린 - 동화라기에는 때로 너무나 사실적이었던 만화였다. 여러 매체를 거치면서 꽤 오랫동안 연재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벤의 어미의 주인이 등장하기도 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는 불운한 만화. 단행본도 있었던가?
바람처럼 번개처럼이라는 재목의 야구만화도 있었다. 중학생 야구가 무대였을 것이다. 주인공 이름이 팔매였다. 아마 동자승이었던가? 그리고 그 라이벌로 정체를 알 수 없는 타자가 등장했었다. 역시 안타깝게도 어떻게 끝났는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워낙 어린 나이였던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을 주는 만화가였다. 다감하고 다정했다. 요즘 만화와 같은 치밀함이나 디테일은 부족했을 지 몰라도 세심한 넉넉함이 그 가운데 있었다. 왠지 화를 내는 장면을 그려도 그다지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은 그런 느낌? 어린이만화에 최적화된 작가였다 할 것이다. 그것이 결국 한계로 작용하기는 했지만.
나중에 박봉성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던 이향원표 기업만화를 기억한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데 대본소로 만화의 주류가 넘어오면서 역시 이향원 선생님도 대본소에 어울리는 기업만화에 도전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설펐다. 어린이 만화에 어울리는 넉넉함은 성인만화에는 잘 들어맞지 않았다. 배신과 음모 같은 것은 박봉성이 그려야 어울린다. 무척이나 슬펐었다. 대가의 몰락을 보는 것 같아서.
참 동물을 잘 그렸다. 그리고 아이들을 잘 그렸다. 동심을 잘 묘사했다. 아이들에 어울리는 천진함에 어울렸다.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매우 따뜻하면서도 엄격한 분이었을 것이다. 이향원 선생님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동물스티커도 사고 했었는데.
기억은 많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억은 없다. 80년대 말 이미 잡지시대에서 대본소시대로, 다시 단행본시대로 넘어가면서 이향원 선생님도 점차 잊혀져가고 있었으니까. 더구나 그다지 인상깊지 않은 - 좋게 말해 무공해의 자극성이 없는 작품을 주로 그리셨으니.
정말 그립다. "이겨라 벤" 투견 만화로서 - 그것도 어린이만화로서 이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일본이었으면 애니메이션으로만 몇 번이나 만들어졌을 것이다. 미국이었다면 영화로도 만들어졌겠지. 그러나 어느새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이.
길창덕 선생님, 신영식 선생님, 고우영 선생님, 그리고 또... 시대는 저물고 앞서 사람들이 떠나면 뒤에 남은 사람들은 그 기억을 곱씹으며 그들을 떠올린다. 그들마저 사라지고 나면 잊혀지거나 혹은 전설이 되거나. 신화시대의 마지막을 보는 느낌이랄까? 이분들이 없이 어찌 지금의 한국 만화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비록 출판만화시장이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지금이더라도.
부디 평안하시기를. 사실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곳에서도 열심히 만화를 그려 많은 이들을 즐겁게 해 주시기를. 벤을 다시 보고 싶다. 그리울 것이다. 진심으로. 잘 가시라.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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