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전지적 글쓰기의 문제...

까칠부 2011. 2. 24. 09:51

한때 화제가 되었던 궁예의 관심법이란 다른 게 아니다. 행간을 보는 것이다. 말이며 행동하는 행간을 보고 그 이면을 보는 것이다. 좁은 틈을 비집고 작은 조짐을 키우고.

 

문제는 쓸데없이 현미경을 갖다 들이대면 현상은 왜곡되기 쉽다는 것이다. 돋보기로 보아야 할 때가 있고, 광학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때가 있고, 전자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때가 있다. 제대로 보자면서 양파껍질을 전파망원경으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흐릿하니 망가진 그림을 보고 그때서야 망상을 불사른다. 사람의 꿈은 매우 모호한 이미지의 연속이다. 그 모호한 이미지들이 사람들의 의식에 의해 구체화되고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제대로 의미와 상징에 대해 이해하면 또 모르겠지만. 기호학의 기초나 가지고 분석하면 또 모르겠다. 논리라든가 인식론이라든가 구조론 등에 대해 알고서 한다면. 물론 나도 다는 모른다. 겉핥기일 뿐.

 

그런 기본이 배제되었을 때 타블로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정선희에 대한 증오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어떻게 인식하고 판단할 것인가? 어떻게 그 대상을 정의하고 이해할 것인가? 그래서 인문학이 중요한 것일 테지만, 그러고 보니 나도 고등학교 때까지 그런 걸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사물을 인식하는 게 먼저고, 그로부터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고, 그 이후에 모든 논리는 전개되는 것이다. 전지적 글쓰기가 가능한 것은 그래서다. 모르니까. 무지는 무모함을 부르고 무모함은 해서는 안 되는 영역까지 아무렇지 않게 건드린다. 그러고서도 모른다.

 

원래 자칭 진보논객입네 하는 인간들과 어울리며 그 무식함에 대해 일찌감치 깨달은 바 있지만. 임제가 사미의 손가락을 자른 것이 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도 어지간히 무식한 축에 드는데 때로 나도 꽤 유식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서. 그렇다고 내가 유식한가? 내가 유식하면 우리집 고양이녀석들도 유식하다.

 

아무튼 그래서 내 글쓰기의 원칙은 한 가지다. 보이고 들리는 만큼만 보고 듣고 이해한다. 넘어서지 않으려 한다. 어려운 일이지만 그게 정석일 터이므로.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