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로열패밀리 - 김인숙의 죄, 처녀경매의 의미...

까칠부 2011. 4. 14. 09:05

문득 생각했다. 이 드라마가 2002년 하반기에 방영되었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과연 어떠했을까? 당시 한창 주한미군지위에 대한 협정, 이른바 SOFA의 불평등조항에 대한 개정요구가 드셀 때 지금의 드라마가 방영될 수 있었다면?

 

그래서 처녀경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1992년 윤금이씨 사건이 있었다. 차마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어지간한 사이코패스범죄보다도 더 끔찍했던, 그야말로 고어이며 호러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여론은 침묵했다.

 

2002년 어째서 대중은 신미선, 심효순(당시 각 15세) 두 여중생의 죽음에 그렇게 들끓었던 것일까? 타이틀도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여중생 사망사건. 미군이 여중생을 죽인 것이다. 그것은 동두천의 한 성매매를 하던 여성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녀들은 꽃이었다. 순수하고 순결한 꽃이었다. 지켜주었어야 할 여동생이었다. 반드시 지켜야 했던 모성이며 순결한 자궁이었다. 그에 비하면 당시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던 기지촌 여성들에 대한 범죄는 타락에 대한 징벌이며 응징에 불과했다. 순결하지 못한 그녀들에 대한 응징이었으며 자업자득이라는 말로 이해되었다.

 

과연 김인숙(염정아 분)이 실제 이태원 클럽에서 몸을 팔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처녀경매가 아닌 몸을 팔던 입장으로써 그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면? 순결하지 않은 자궁은 더 이상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전통적인 정조관념에서, 그리고 도덕주의와 엄숙주의가 지배하는 자업자득의 문화에서, 그녀는 아마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용서받지 못한 죄를 지은 것일 수도 있다. 그 자체로 그녀는 시청자들에 의해 단죄될 수 있다.

 

그녀가 처녀여야만 했던 이유였다. 그녀가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순결해야 했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했기 때문에. 동정이나마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로써 그녀의 행동은 정당성을 얻는다. 자신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한지훈(지성 분)의 아버지 한우석과 엄기도(전노민 분)는 그래서 김인숙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스티브 스튜워드 하사를 공격하고 목숨을 걸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처녀를 요구한다. 순결하고 순수한. 그래서 그녀는 또한 기지촌에 있어야 했다.

 

한국인이되 한국인이 아니었던 그녀들. 한국사회에 속해 있으되 누구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고 심지어 보호받지도 못하던 그녀들. 아니 아예 인간조차도 아니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조차 그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외면했으며 보호하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기지촌이라는 수용소에 격리된 채 인간 이외의 존재로서 살아가야만 했었다. 김인숙이 인간이고자 했던 것. 김인숙이 인간임을 증명하려 했던 것. 인간임을 증명해야만 했던 이유. 그녀의 죄의 이유.

 

추악하다 말한다. 김인숙의 과거가 점차 드러나게 되었을 때. 이태원 기지촌에서 성매매여성들과 함께 생활했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녀 또한 포주 강미자에 의해 성매매를 강요당하던 정황을 들어. 그녀는 그 순간 죄인인 것이다. 미군과 결혼하고 미군의 아이를 낳은 것으로도. 혼혈아를 낳은 그 자체만으로도. 과연 조니 헤이워드가 미국이 아닌 국내에서 어머니 김인숙과 함께 한국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다면 그의 삶이란 또한 어떠했을까?

 

불행한 과거사이며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현재진행형의 아픔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녀는 죄를 지었다. 그녀의 원죄는 그녀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한지훈의 아버지 한우석과, 그로 인해 정신질환을 앓게 된 한우석의 어머지 서순례와, 그리고 고아 아닌 고아가 되어 버린 한지훈이다. 그 댓가로 그녀는 자신의 순결을 지켰고, 그러나 미군과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으며 생명을 유지했다. 한지훈은 그녀의 원죄이며 그래서 속죄가 되는 것이다. 그녀가 그 순간 놓아버리고 온 인간으로서의 증명일 수 있었던 것이다. 죄와 함께 버리고 온 죄의 증명이자 인간의 증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니 헤이워드가. 그녀의 아들이. 또 하나의 죄의 증거가. 그녀의 버리고 온 또 하나의 인간의 한 부분이. 사라져버린 증거가.

 

아마 원래대로였다면 김인숙은 처녀경매의 대상이 아닌 기지촌의 여러 기구한 인생들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그것이 이제까지의 내용에도 부합된다. 그렇다면 당시 기지촌 여성들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다름아닌 주한미군이었을 테니 김인숙이 윌셔 헤이워드와 함께 미국으로 떠나는 정황도 이해가 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녀들이었기에. 어디에도 그녀들을 위한 자리는 남아 있지 않았기에. 손님이던 주한미군의 마음을 사로잡아 이 땅을 떠나는 것만이 그녀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구원이었다. 아무런 기약이 없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역만리 타국으로 떠나면서도, 그 삶 또한 결코 순탄치 못할 것임에도, 그러나 그녀들은 그렇게 떠나야만 했었다. 그녀들 자체가 죄이기에.

 

그것은 그녀들 자신의 죄라기보다는 사회가 찍은 낙인이라 할 수 있었다. 순결하지 못하다.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 자궁을 지키지 못했다. 조니는 그녀가 어머니라는 증거인 동시에 그녀의 죄의 증거인 것이다. 그것이 원래 의도였다면. 그녀를 지키려다 죽어간 한우석과 그와 관련한 그녀의 원죄처럼.

 

처음 의도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단지 시청자와의 타협을 위해서. 시청자의 보편적 정서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대중매체를 통해 보여지는 드라마이기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이었을까? 아니라면 어쩌면 효순, 미선양의 경우처럼 처녀성을 강조함으로써 미군의 죄를, 그리고 김인숙이 짊어져야 할 원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조니, 그 아이가 죽기 전이었다면 그럴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이제... 이젠 그게 안 돼.”

 

아무튼 그래서 그 순간 그녀는 어쩌면 속죄를 포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죄를 고백하고, 죄를 용서받고, 그리고 다시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간다. 죄를 짓기 전의. 죄를 짓기 전의 순결한 자신으로. 인간으로.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 지난 시간들을 보상받는다.

 

하지만 조니가 죽었다. 아들 조니 헤이워드가 죽었다. 죽음에 앞서 아들을 외면하고 아들을 떠나보냈다. 영영 속죄할 수 없는 죄를 조니 헤이워드는 안고 떠나간 것이다. 그녀의 죄는 이제 누구로부터도,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용서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기를 바란다. 누군가 자신을 응징해주기를. 자신의 죄를 처절하게 응징하여 그 죄에 대한 댓가를 치를 수 있기를. 그것은 파멸을 위한 질주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응징하기 위한. 그를 위해서 자신에 가해진 죄를 또한 응징하기 위해서. 속죄할 수 없는 그녀가 이제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처절한 파국에 의한 단죄 뿐.

 

“언니, 나... 엄청난 싸움을 앞두고 있어. 내가 18년 동안 당한 것 한꺼번에 돌려주려고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 조금만 기다려요. 이번 일만 끝나면 나 지훈이한테 다 털어놓으려고. 지훈이 아버지는 어쩌다가 돌아가셨는지, 내가 왜 몰래 지훈이를 후원해야만 했는지. 그리고 내 아들... 내 아들... 조니... 그 가련한 아이의 죽음에 대해서도...”

 

다만 의문이 남는다면 과연 김인숙은 조니 헤이워드를 살해한 것일까? 예고편에서 나온 집사 엄기도의 대사도, 그리고 강충기(기태영 분) 검사가 끝내 찾아낸 온정공원 2교시라는 퍽치기 조직과 그로부터 여권을 산 명동의 여권브로커의 존재가 사건을 한 차례 꼬아 버린다. 만일 김인숙에게 조니 헤이워드가 죽었다면, 그래서 그 시체로부터 여권만 훔친 것이라면, 굳이 분량도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 같은 장면을 중간이 끼워 넣을 이유가 있을까?

 

사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조니의 죽음에 대한 김인숙의 죄의식. 그것은 어쩌면 ‘내가 죽였다!’라는 한 마디 때문에 살인용의자가 되어 구속되고 재판을 받아야 했던 어느 한국인 어머니의 절규와도 닮아 있지 않았을까?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듯 조니의 죽음에 대해 김인숙은 자신의 죄를 떠올려 버린 게 아니었을까? 조니야 말로 그녀의 죄의 증거였을 테니. 사람을 죽이고, 한기훈의 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만들고, 무엇보다 그녀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 순결을 요구하는 한국사회의 도덕주의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자궁을 지키지 못했다.

 

물론 JK와 공순호(김영애 분)와의 싸움도 바야흐로 본격화되려 하고 있다. 공순호는 마침내 조현진(차예련 분)을 후계자로 삼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그 사실이 엄기도를 통해 김인숙에게 알려진다. 철저히 후계구도에서 배제되어 미국 지사로 떠나게 된 동생 조동민(김정학 분)과 동서 양기정(서유정 분)의 반발에도 마침내 승리했다는 성취감에 도취되었던 것도 잠시, 공순호의 구성의 피를 용납할 수 없다는 순혈주의는 임윤서(전미선 분)의 분노를 산다.

 

하기는 양기정의 분노나 임윤서의 분노나 같다. 양기정과 임윤서의 분노는 김인숙의 분노와 그 방향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다. 인간이고자 하는 것.

 

“다행히 우리 부부가 금슬만은 좋거든요? 누가 길고 짧은지 늙어서 꼭 대 보자구요, 네?”

 

그래서 임윤서는 K인 김인숙과 손을 잡는다. K인 김인숙은 구성의 프린세스 임윤서와 연대한다. 가족의 관계를 걸고. 하긴 K인 김인숙에게 JK에 가족이란 것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리고 동병상련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형님이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에요. 대놓고 K라고 불린 저 때문에 형님과 동서는 다른 대접을 받았다고 착각하셨죠. 하지만 어머니 결혼으로 얻은 이득 그 이상의 댓가를 절대로 며느리들에게 내주실 분이 아닙니다.”

 

공순호에게 그녀들은 며느리가 아니다. 가족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다. 어처피 ‘저것’이다. 오로지 그녀와 피가 이어진 자식들만이 그녀에게는 가족이며 인간이다. JK에 이익이 되는 자가 가족이다, 그 가족과 이 가족은 다른 의미의 가족이다. 공순호의 또 하나의 약한 부분이다. 혈연에 집착하는 모성의 본능. 그리고 그것이 그녀를 궁지로 내몬다. 어차피 인간적인 유대에 의한 관계가 아니라면 이익이 깨졌을 때 얼마든지 돌아설 수 있다. 그것은 그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임윤서는 마침내 자신이 꺼낼 수 있는 마지막 패를 꺼내든다. 그것은 김인숙이 공순호를 위해 준비한 마지막 카드이기도 하다. JK메디컬과 남편 조동호와의 관계는 단지 선전포고에 불과하다. 그렇게 공순호가 이룬 JK라는 제국은 안에서부터 위협받는다. 과연 공순호와 조현진은 그러한 김인숙과 임윤서, 두 며느리들의 반란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또 하나의 흥미로운 부분이다. <로열패밀리>를 이끌어가는 두 개의 큰 축이다. JK에 대한 김인숙의 싸움, 그리고 과거와 얽힌 김인숙의 죄. 마침내 임윤서를 끌어들이고 공순호와의 일전을 준비하는 김인숙과, 김인숙과 얽힌 자신의 과거를 찾아내며 마침내 그녀를 교회로 불러내어 죄를 고백받으려는 한지훈. 죄와 응징, 그리고 속죄, 용서. 복수. 진부하지만 증오와 사랑. 복수는 인간의 당연한 권리 가운데 하나다. 용서 역시.

 

“아니, 넌 그러지 못할 거야. 넌 이미 나를 김인숙이 아닌 김마리로 보기 시작했는 걸. 거짓말처럼 꼬이고 꼬인 김마리의 과거를 너에게 다 털어놓는다고 해도 넌 믿지 못할 거야. 나를 믿겠다는 말? 그건 그냥 이제 너의 의지일 뿐이야. 너의 마음속에서는 나에 대한 단죄가 벌써 시작되었거든.”

“내가 이해한다잖아. 이해하지 못하면 내가 죽을 것 같다잖아!”

 

서로 엇갈리는 진실,

 

“진실이 뭘 할 수 있니, 지훈아? 진실이 뭘 할 수 있냐고?”

“날 살릴 수 있어요.”

 

김인숙을 용서하고픈 지훈과 결코 용서받고 싶지 않은 김인숙. 자신부터 용서하지 못하는 김인숙 앞에 한지훈이 요구하는 진실이란 무의미하다. 이미 죄는 저질러졌고 그것을 속죄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한지훈은 그녀를 용서하기 위해서라도 진실을 들어야 한다.

 

김인숙이 믿지 못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그런 김인숙보다 더 김인숙을 믿고 싶어하는 것은 한지훈이다. 미칠 것 같은 불신 속에. 죽을 것 같은 원망과 분노 가운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교회라는 것이. 속죄를 바라지면 그녀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은 죄는 그조차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싶은 구원은 그래서 더 분노하고 원망하게 된다. 그조차도 그녀가 바라는 것이다.

 

다만 조금은 식상하다는 느낌이었다. 어째서 그 장면에서 엄기도는 서순례를 데리고 나타난 것일까? 갑작스레 몰입이 확 깨어지는 느낌이었다. 너무 진부하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 아니었을까? 진실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심이 필요하다. 진실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진심과 만나야 한다. 진실을 알지 못하는 한지훈의 진심과 진심을 믿으려 하지 않는 김인숙의 진실. 그것을 이어주는 것은 정신을 놓아버린 서순례일 것이다. 김인숙의 잃어버린 진심과 한지훈의 미처 알지 못하는 진심을 채워줄.

 

한 차례 정리하고 간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간만 보았던 여러 장치들이 비로소 정리되어 보여진다고. 이제까지 준비된 여러 재료들이 하나하나 요리가 되어 테이블을 채워나갈 것이라고. 화려한 코스요리가 이제 차례로 테이블을 채우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아직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결되는 듯 여전히 새로운 의문이 제기된다. 새로운 반전을 위한 또다른 재료들이 하나하나 펼쳐지고 있다. 이것들은 과연 어떤 요리로 완성될 것인가? 코스가 다 끝났을 때 어떤 포만감으로 자리에서 일어날 것인가?

 

아픈 우리의 역사를 떠올리며. 그것이 지금도 현재진행형일 수 있음을 생각하며. 김인숙이 짊어져야 했던 죄와, 그리고 그같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현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도 사회이며,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하는 것도 결국 사회다. 김인숙과 임윤서가 공순호에 의해 ‘저것’이 되었듯. 그녀들의 반란처럼. 원작의 제목 그대로 인간이라고 하는 증명에 대해서도.

 

“법이 모두에게 평등하다고 보십니까?”

 

아직 보이지 않은 것들이 많다. 보아야 할 것들도 너무 많다. 앞으로의 전개에 대해서. 과연 김인숙의 죄와 한지훈의 용서는, 아니 과연 그것은 죄일 것이며 용서는 이루어질 것인가? 마치 체한 듯 묵직하게 걸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역사가 만들어낸 원죄. 아프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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