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나는 가수다 - 음악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까칠부 2011. 5. 30. 08:10

임재범도 "빈잔"의 무대를 앞두고 말한 바 있었다.

 

"음악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판단은 선험의 영역이다. 즐기는 것은 체험의 영역이다. 판단은 그 무대를 보고 듣고 하기 이전에 이미 내려진다. 즐기는 것은 그 무대를 보고 듣고서야 이루어진다.

 

선험은 금기를 만든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이러면 안 된다. 그러면 안 된다. 그것은 도덕적인 규범이며 의무이기도 하다. 때로 그것은 단죄를 요구하기도 한다.

 

전에도 말했지만 세상에서는 불려져서는 안 되는 노래도, 좋아해서는 안 되는 음악도 없다. 노래를 해서는 안 되는 가수도, 무대에 올라서는 안 되는 음악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음악은 존재하며 들려진다. 음악인은 무대에 올라 그 음악을 부르고 연주한다. 그리고 단지 대중은 그 음악을 듣고 즐긴다.

 

체험이란 개별적인 것이다. 내가 체험하는 것이지 다른 누군가 체험하는 것이 아니다. 즐기는 것 역시 내가 즐기는 것이다. 내가 음악을 듣고 내가 음악이 좋아서 즐긴다. 선험은 나 이외의 사람들이 결정한다.

 

어째서 그동안 <나는 가수다>를 두고 시끄러웠는가. 아니 5월 29일 방송된 <나는 가수다>를 두고서도 그렇게 시끄럽다. 특정 가수 때문이다. 그녀에게 자격이 있는가. 출연할 자격이 있고, 감히 경연에서 1위할 자격이 있는가.

 

솔직히 내게도 옥주현의 무대는 취향이 아니다. 나는 약간 모자르거나 넘치는 것을 좋아한다. 그 미묘한 여유와 여백이 나로 하여금 감정을 담을 수 있게 한다. 그에 비해 옥주현의 노래는 너무 명쾌하다. 분명하고 확실하다.

 

물론 노래는 정말 잘한다. 이미 아이돌이던 "핑클" 시절부터 그녀의 노래실력은 정평이 나 있었다. 아니 핑클이라고 하는 걸그룹 자체가 라디오 프로그램의 라이브 코너를 통해 입증된 그녀의 노래실력을 보고 그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난 일요일의 무대에서도 그녀는 뮤지컬을 통해 단련된 가창력과 표현력과 연기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나와는 그것이 맞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인들이 대신이라고까지 추앙했던 임재범의 무대에 대해서도 별로라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보컬리스트이지만 이승철의 노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조용필의 음악을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각자 개인적인 체험에 따른 판단이며 평가다. 그것을 감상이라 부른다.

 

구분해야 한다. 선험적으로 판단하여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혹은 이래서는 안 된다, 저래서는 안 된다. 그에 비해 일단 듣고 나니 그것이 내가 듣기에 좋다, 혹은 싫다. 좋거나 좋지 못하거나 아예 나쁘거나.

 

그래서 청중평가단도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기준은, 내가 듣기에 좋은가 아닌가. 내가 듣기에 누구의 무대가 더 좋았는가. 정확히는 평가라기보다는 감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개개인의 성향의 집합에 불과하다.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하듯.

 

오로지 그것 뿐이다. 음악인은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듣기 좋으면 좋은 것이다. 듣기 안 좋으면 안 좋은 것이다. 대신 다른 누군가는 좋을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서바이벌이니 결국 듣기에 안 좋다는 사람들이 많으면 경쟁에서 밀려 도태되고 말 것이다. 굳이 그것을 미리 나서서 이러느니. 저러느니.

 

결국은 전에도 말했듯 <나는 가수다> 자신이 만든 함정이 아니겠는가. 역시 임재범이 방송 도중 말한 내용이었다.

 

"노래 잘 하는 가수들이 대우받는 게 당연한 거고..."

 

노래 잘하는 가수들을 대중에 알리고 대우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 <나는 가수다>의 캐치프레이즈는 가수는 노래를 잘 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아 맞물려져 <나는 가수다>에 도덕적 권위를 부여했다. <나는 가수다>는 노래를 잘하는 가수들이 출연해서 한 단계 차원이 다른 무대를 선보이는 프로그램이다. 장차 아이돌 위주의 대중음악계를 바꿀 것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앞서 말한 도덕적인 금기가 더해지게 된다.

 

"이런 가수는 출연하면 안 된다."
"이런 가수들만이 출연해야 한다."

 

혹은,

 

"이런 수준 이상의 무대만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 임재범이 불을 붙였다. 임재범이 보여준 차원이 다른 열정과 에너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표준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일단 임재범의 무대를 경험하게 되고 나서 그보다 덜 자극적인, 덜 놀라운 무대에 대해서는 무덤덤해지게 되었다. 지난주 <나는 가수다>를 보고 실망스럽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래서다.

 

경건해진다. 듣고 즐기는 무대가 어느새 경건하다 못해 엄숙해진다. <나는 가수다>라고 하는 예능프로그램에 엄숙한 어떤 당위와 의무가, 가치와 의미가 부여된다. 선험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선험이란 바로 다수의 보편 가운데 있는 것이다. 나 이외의 사람들도 공감해야 하는 것. 논란의 시작이다. 다른 사람도 나와 같아야 한다.

 

결국은 비로소 무대를 통해 듣고서야 판단할 수 있는 것을. 그래서 결국 옥주현은 경연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1위가 되었다. 옥주현이 부른 "천일동안"도 각종 음원차트에서 1위를 석권하고 있다. 체험의 결과다. 그런데 그것조차 선험으로써 판단하려 하니 인지의 부조화가 일어난다. 인정할 수 없다.

 

<나는 가수다>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한계일 것이다. 너무 과열되었다. 너무 엄숙해졌다. 너무 경건해졌다. 그래서 사소한 무대로는 차마 견디기 힘들다. 일상의 무대로서는 더 이상 만족하기 힘들다. 선험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로써 판단하고, 그리고 그에 동의하도록, 아니면 동의를 전제로 행동에 나서고. 벌써부터 그로 인해 과열되어 일주일 내내 시끄러워지는 <나는 가수다>에 대한 피로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조금은 <나는 가수다> 자신도 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긴 당장 가수들의 컨디션을 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재 서고 있는 무대가 <나는 가수다> 하나 뿐인 것도 아니고, 콘서트도 해야 하고, 행사도 해야 하고, 음반을 준비하는 가수가 있으면 그것도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나는 가수다>에 이렇게까지 에너지를 쏟아붓고 나면. 더구나 지나치게 자극에 익숙해지고 나면 더 이상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 필자의 경우에도 이제 더 이상 자극적인 무대는 사양이다.

 

지난 일주일의 논쟁과 지난주 무대를 통해 드러난 <나는 가수다>의 근본적 문제이며 고민하고 모색해야 할 부분이 아니겠는가. 옥주현 한 사람 들어오는 것 가지고도, 어쩔 수 없이 하차해야 했던 임재범을 두고서도, 결국 청중평가단이 평가한 결과에 대해서도, 이것이 과연 정상인가. 과연 이대로 언제까지고 계속 갈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그다지 마뜩한 프로그램은 아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비판을 해 왔고, 마음에 안 들거나 하는 부분들에 대해 지적도 해 왔었다. 하지만 최고의 음악인들이 만드는 최고의 무대라는 점에서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마 <나는 가수다>에 비판적이던 사람들이 슬금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무대가 오래 되었으면. 비판과는 별개로 <나는 가수다>의 무대에 서고자 하는 음악인이 있고, 그를 통해 보여주고 들려주고자 하는 음악이 있다면 계속해서 보여지고 들려질 수 있었으면. 그래서 더욱 다시 비판하게 되는 것이다. 고민이 필요하다.

 

아무튼 역시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 탓인지 확실히 지난주보다는 무대에서 힘이 빠져 있었다. 잔뜩 힘을 주고 부르던 무대에서 힘을 빼고 부르려니 많이 허전해지고 어색해지고 있었는데, 김범수와 BMK가 대표적일 것이다. 김범수는 "네버엔딩스토리"가 너무 버거웠고, BMK는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기가 버거웠다. "편지" 도입부의 읊조리는 듯한 감정표현이 무척 좋았었는데 나중에는 자기 감정을 자기가 주체 못하는 듯 보였다.

 

그에 비하면 YB는 물을 만난 듯 록의 명곡 "해야"를 최신 사운드로 재해석해 신명나게 불러제끼고 있었고, 이소라는 이제 순위 따위 무슨 상관이냐는 듯 무대와 새로운 시도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이소라의 이같은 무대는 나로서도 처음 보는 듯. 목은 쉬었지만 그래서 더욱 간절하게 섬세하게 박정현도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았을까. 유재하의 원곡에 비교하기에는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박정현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정의 선이 살아 있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 나아진 것이 있다면 못해진 것도 있다. 이 역시 순수하게 즐기는 것일 게다. 항상 최선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항상 최상인 채로 있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라이브를 쫓아다니다 보면 프로가수들조차 언제나 한결같은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들려주는 것이 프로다. 감기로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그동안 임재범이며, 윤도현이며, 이번에는 박정현까지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었듯. 관객도 그에 호응해야겠지.

 

미리 판단하지 말 것이며. 그것을 절대시하거나 강요하지 말 것이다. 순수하게 듣고 그 순간에만 판단하고 말아야 할 것이다. 7위가 아주 못해서 7위가 아니며 다만 1위는 그 가운데 가장 좋았기에 1위다.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이다. 순위란 의미가 없다. 단지 훌륭한 아티스트와 그의 무대와의 만남에 대한 자축인 것이지.

 

그러면 시끄러울 일도 없을 텐데. 결과에 대해 마음에 안 든다고 그것 가지고 논란을 일으킬 일도 아닐 것이다. 결과가 그랬다. 단지 그 무대에 대한 당시의 그들의 결과가 이러했다.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한가?

 

평생 가요순위프로그램에서 1위 한 번 - 아니 10위권에조차 들지 못하는 음악만 좋아하다 보면 깨닫게 되는 진리다. 감상은 내가 하지만 순위는 다른 사람이 결정한다. 내가 좋은 것이고,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둘은 별개다. 중요한 것은 듣고 있는 자신. 그리고 무대에 선 아티스트. 가장 관능적인 필연의 만남일 것이다.

 

이것은 콘서트장이 아닌 것이다. 내가 좋아해서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 자발적으로 찾은 콘서트장이 아닌 것이다. PD가 섭외하고 준비한 무대이고 그에 의해 보여지는 무대일 것이다. 정히 자기 입맛에 맞는 무대와 결과만을 요구할 것이라면 차라리 그를 위한 무대를 찾아 떠나던가.

 

어쨌거나 조금 더 힘을 뺐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작진도, 가수도, 그리고 시청자도. 덜 진지하고 덜 심각하고 덜 비장하고 덜 치열하게.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순수하게 보고 그것을 즐길 수 있게. 말 그대로 예능이 될 수 있도록. 쇼가 될 수 있도록.

 

그래서 대안으로 삼고 싶은 것이 과거 KBS의 <빅쇼>와 같은 진정한 스페셜 무대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굳이 경연하지 않는 음악 자체를 듣는 무대를. 하긴 경연도 않는 음악프로그램 따위 아무도 보지 않을까? 이 또한 한계이며 현실일 것이다. 굳이 서바이벌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야 하는 이유다.

 

JK김동욱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임재범과 다름을 알겠다. 그의 노래에서는 임재범과는 전혀 다른 색깔과 감성이 묻어난다. 한층 더 우울하고 한층 더 끈적거린다. 그것이 때로 관능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JK김동욱은 JK김동욱이다. 그의 출연을 환영하며 축하한다. 반갑다.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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