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문서 하나 위조하는게 뭐 이리 쉽고 간단한가. 필요한 서류가 있으면 어디선가는 위조전문가가 나타나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위조에 성공하고 만다. 설마 장미리(이다해 분)의 동경대 졸업장 위조 하나로 한 회를 다 보낼 줄이야.
얼마나 서툰가. 얼마나 순진한가. 이런 것을 좋다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타고난 사기꾼이 아니다. 악한 것이 아니다. 독한 것이다. 약한 것이다. 도쿄로 돌아가라는 말 한 마디에도 발끈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마는 그녀이기에 정직하자고 겨우 찾아온 취직의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에게 주어진, 일본에서의 지옥같은 시간들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일생일대의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까. 아무리 호스티스 생활을 하며 밑바닥 생활에 단련이 되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작정 관광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들어온 터였다. 더 이상 그런 시궁창과도 같은 생활을 반복하지 않으려 성실하게 일해서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그것을 바꿔 놓은 것이 그녀를 성추행하려던 면접관이었지만 말이다.
그것은 극적인 반전이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일본에서와는 달리 성실하게 열심히 충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행복도 누릴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를 성추행하려던 면접관은 그녀의 앞에서 그것을 철저히 부정하며 부숴놓았다. 학력도, 경력도, 가족도,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그녀에게 한국이란 결코 반가운 얼굴을 지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한국에서도 일본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때 장명환(김승우 분)을 만났다. 사정을 설명하고 동정을 구하려 했으나 장명환은 그런 동정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심코 내뱉은 '동경대'라는 한 마디에 반응하는 장명환에게 그녀는 마지막 주어진 기회를 포기하지 않을 결심을 한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그 기회를 부여잡고자.
얼마나 가련한가. 그러면서도 얼마나 집요한가. 학력을 위조해서라도 취직을 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과 그 절박함으로 인한 집요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장미리라는 한 인간에 대한 설명이 이것으로 이루어진다. 가련하면서 집요하다. 마치 성추행을 당하고 나오면서 손을 벌벌 떨면서도 옷차림과 자세를 바로 갖추려던 그 모습처럼. 그리고 자신의 뒤를 쫓는 히라야마의 모습에 불안해 하는 그 모습도 또한.
쫓기듯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에 쫓기며 더욱 궁지로 내몰린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문희주(강혜정 분)는 그런 그녀를 위한 한 기회였을 뿐이었다. 하기는 어렸을 적 잠시 고아원에서 함께 지냈던 것이 고작인 친구에게 무슨 대단한 의리가 있을까? 그보다는 당장 그녀 자신이 살아야 한다. 인간이란 다시 한 번 악한 것이 아니라 독한 것이고 약한 것임을.
하여튼 그래서 문득 장명훈과 장미리와의 관계를 예고하는 대사 한 마디,
"이사님은 분명히 좋은 아버지가 되어 주실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그녀는 이제껏 양아버지의 노름빚을 갚느라 술집에서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었다. 고아로써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아버지는 일찍 죽었으며, 양부모조차 그다지 시원치 못했다. 부모를 바란다. 오히려 강해지려 하는 그녀이기에 기댈 수 있는 누군가를 바라게 된다. 그러면서도 어쩐지 잊고 있던 모성본능을 일깨우는.
"그러고 보니까 이게 얼마만에 칭찬을 듣는 건지 모르겠네요."
역시 장명훈이 장미리에게 이끌리는 이유일 것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부모님과, 그리고 한참 차이가 나는 대단한 집에 사위로 들어가서는 그에 눌리지 않고자, 그렇게 평생을 의무만 지고 힘겹게 버텨오던 그에게도 기댈 수 있는 그늘은 필요한 것이다. 그를 칭찬해주고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너무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아내 이귀연(황지현 분)과는 다른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쓸쓸하세요?"
부성에 대한 동경과 남성에 대한 연민. 그는 기대고 싶은 사람이며 보듬어주고 싶은 사람이다. 아마 이 쯤 왔으면 이야기는 거의 끝났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장명훈에게는 장미리가 그토록 바라던 현실의 안정과 여유가 있다. 그와 함께 한다면 결코 과거와 같은 절박함은 없을 것이다.
작품에 따라서는 바로 이 단계에서 바로 진도를 나가버리는 경우도 있기에. 조금은 기대했었다. 몸이 먼저 가고 나면 마음이 따른다. 마음이 가고 몸이 따르는 것과는 또 다른 경우다. 하지만 드라마는 한국드라마였고 장미리의 삶은 그보다 더 처절하고 치열하다. 다만 이로써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복선은 깔아주었달까? 두 사람의 만남은 필연이다. 관계의 진전을 예상해 본다.
아무튼 장미리의 친구로 나오는 문희주와 장미리를 좋아하는 남자로 나오는 유타카(박유천 분)의 존재 역시 흥미롭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생 짊어져야 했던 것이 누려야 했던 것보다 더 많았던 이 두 상처투성이 남녀에 비해 두 사람은 너무 그늘 없이 맑고 밝다. 같은 양녀로 들어갔어도 문희주는 충분히 사랑을 받은 듯하고, 아직까지 유타카에게는 지워진 짐이 그다지 무겁지 않다. 한 마디로 도련님일까? 충분한 여유가 드러난다.
서로 다르기에 캐릭터가 드러난다. 서로 다르기에 얽히고 섥히며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장미리와 유타카, 그리고 문희주와 유타카, 장미리와 장명훈, 장명훈과 유타카, 그리고 이귀연... 문희주를 닮아 밝고 해맑은 이야기였으면 좋을 테지만, 그러나 찢기고 부서지면서도 악착같이 기어 오르는 장미리의 이야기도 매력있을 것이다. 그 끝이 비록 파국이고 어둠일 뿐일지라도 그 순간의 의지에는 낙천할 수 있고 긍정할 수 있는 힘이 느껴질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의 빛이다. 깊은 밤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가운데 어느새 느끼는 말간 느낌처럼. 그런 힘이 장미리이게에는 있다.
완벽하게 장미리라는 인간이 되어 버린 이다해와 자신보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에 더 익숙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김승우, 강혜정의 연기는 천연덕스럽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박유천은 딱 도련님의 모습 아닐까? 그늘이라든가 구김살과 같은 단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한. 귀티까지 느껴지는 것이 그를 위한 배역이라는 생각이다. 결국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것이 배우들이라면 일단 캐스팅만으로도 크게 먹고 들어가지 않을까. 적절하다.
장미리가 PPA로써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면이 얼마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기대했었는데. 하지만 그녀는 주인공이다. 1회와 2회는 그녀를 위해 준비되고 할애된 것이리라. 더욱 선명하게. 더욱 잡힐 듯 또렷하게.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바람처럼 그녀가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녀와 눈을 마주한다. 그녀는 그렇게 현실에 존재한다. 존재하는 실체로써. 마치 살아있는 듯.
기대하게 되는 드라마다. 특히 인물들 하나하나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 아느 어느새 이입해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작가의 힘이며 연출의 힘이며 배우의 힘이다. 이입하며 볼 수 있는 드라마가 좋은 드라마일 것이다. 재미있었다. 무척. 만족스런 경험이었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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