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는 것과 비판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구하라가 "여자이니까"를 불렀다.
"못부르네?"
비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넘어서 한 열흘 지나서 다시 그 동영상을 올리며 말한다.
"노래 못하지?"
이게 까는 거다.
차이를 알겠는가?
누군가 어떤 말을 해서 그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건 잘못되었다."
시간이 흘러 잊혀질 때 쯤 누군가 끄집어낸다.
"쟤가 원래 이런 말 하던 놈이야!"
비판은 사실에 대한 것이다. 단지 그 사실에 한정하여 평가하는 것이다.
까는 것은 진실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진실에 대해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다.
바로 그거다. 단죄.
악플러와 일반 네티즌의 차이. 없다.
내가 항상 말한다. 악플러와 네티즌의 구분은 없다. 대부분의 악플러는 정의롭다. 왜?
바로 까는 것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는 닫혀 있다. 한 마디로 좁다. 완결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것에는 의미가 한정되어 있고 그 자체로써 도덕적 가치가 부여된다.
그것을 벗어나면 당연히 응징이 가해진다. "깐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언가 잘잘못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다. 그보다는 개인에 관계가 있다.
"그는 잘하는가? 못하는가?"
그보다는,
"그는 옳은가? 혹은 그른가?"
그리고 그에 따른 단죄를 내린다.
흔히 말하는 까방권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면책특권과 같은 것이다. 책임을 묻지 않겠다.
자기는 상당히 옳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판사인가? 경찰인가? 검찰인가? 집행인인가?
까는 순간 그는 악플러가 된다. 비판하는 것을 두고 악플러라 하지 않는다.
내가 항상 경계하는 것들이다. 최소한 비판은 해도 까지는 말자.
나의 경우는 깐다기보다는 들이받는다는 표현을 주로 쓰는 편이다.
이를테면 타진요를 들이받는다.
역시 차이일 것이다. 깐다는 건 약자에 대한 것이다. 만만하니까.
하지만 난 참 욕먹는 글도 잘도 쓰지.
때로 내가 왜 이러나 싶다. 무모하게스리. 좋은 글만 쓰기도 바쁜데.
까는 것은 악플이 아니다. 까는 것은 정의다.
악에 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에 악이 있고 정의에 악이 있다.
악은 단지 독하고 약한 것이지만,
선과 정의는 악이 된다.
악플러가 끊이지 않는 이유다. 악플러는 어디나 존재한다. 누구나 될 수 있다.
과연 비판을 하는 것인가? 까려는 것인가?
판단을 하려는 것인가? 단죄를 하려는 것인가?
그는 단지 못할 뿐인가? 죄인인가?
가장 어이없는 까임은,
"영리하지 못하다."
세상은 넓고 까일 것은 많다. 바람이 이는 잎새도 깔 수 있다.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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