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공주의 남자 - 신면의 비극, 경계에 서다...

까칠부 2011. 8. 18. 09:34

어쩌면 삶이란이란 객관식 시험지와 같다. 각자 이런저런 다양한 답을 준비한다. 그런데 정작 앞에 놓인 시험지에는 네 개 혹은 다섯 개의 선택지만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정답이 무엇은 아무도 모른다. 단지 시간이 흘러 책임이라는 채점지만을 받아보게 될 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문제풀이를 보고서 이 답을 썼어야지 어째서 다른 답을 썼느냐고. 꼭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그런다. 오답을 썼으면 오답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정답이라면 정답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공주의 남자>를 둘러싼 민폐논란의 이유일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어떤 답이 나와 있는가를 알고 있으니까. 그러나 시험장에 있는 것은 세령(문채원 분)과 김승유(박시후 분)와 경혜공주(홍수현 분)와 정종(이민우 분)와 신면(송종호 분) 자신들이다.

 

과연 시험장에 들어가 시험을 치러야 하는 그들이 문제풀이의 답을 알고서 답을 쓸 수 있겠는가.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그들의 부모들이 만든 몇 안 되는 예시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을 텐데도 그 가운데 한 가지를 반드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생각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그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답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삶이란 객관식이 아닌 주관식인 때문이다. 논술이다. 선택지는 넷이나 다섯이지만 각자가 써낼 수 있는 답이란 사람 수 만큼이 나온다. 근사치는 있지만 아주 운이 좋지 않는 한 딱 맞아떨이지는 답은 없다. 그래서 아쉬워하며 미련을 갖는다. 가지 못한 답에 대해. 그리고 선택한 답을 후회한다. 후회와 미련이야 말로 사람의 삶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 아닐까. 강제로 선택해야만 했던 답에 대한 의도치 않은 댓가인 셈이다.

 

어째서 이것이 정답이 아닌가? 어째서 그것이 정답인가? 이것이 정답일까? 아니면 저것이 정답에 더 가까울까? 길을 가다가도 멈춰 머뭇거린다. 다 도착해서도 돌아보며 망설이고 만다. 나는 바로 왔는가. 나는 올바로 틀리지 않게 가고 있는가. 그것을 알지 못하기에 항상 사람들은 어디에도 한 자리에 머물지 못하고 계속 떠돌며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이다. 더 나은 답을 찾아서. 더 정답에 가까운 답을 찾아서. 이미 써낸 답으로 인해 돌아오는 결과를 마주하며. 그래서 더 미련을 가지고, 후회를 하고.

 

만일 자신이 신면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수양대군(김영철 분)을 따르기로 결심한 아버지 신숙주(이효정 분)를 이대로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그대로 방치해야겠는가?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따르자니 죽마고우인 김승유의 안위가 걸린다. 세령을 좋아해서도 수양대군을 따르지만 김승유를 걱정하는 세령의 모습이 마음에 걸린다. 김승유에 대한 질투와 그리고 우정. 무엇이 신면에게 정답이었을까? 결국 수양대군을 따를 것을 결정하고서도 그는 끝까지 김승유와의 우정을 놓지 못하고 번민하고 만다.

 

아버지들의 사정만 아니었으면 그저 좋은 벗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도. 마지막 순간 끝내 김승유를 베지 못하고 몸을 돌려 떠나는 모습처럼 그렇게 벗으로써 오래도록 함께 우정을 나눌 수 있었을 터임에도. 그러나 그는 친구인 김승유를 제압해 잡아야 했고, 다시 정종과 김승유를 속여 김승유의 아버지를 찾아내 죽이는 것을 도와야 했다. 물론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그 자신이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하게도 그다지 다양한 선택지를 주지 않았다. 아버지에 효도하면서도 친구와 우애를 지키는 그런 그가 원하는 답따위는 주지 않았다.

 

세령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가 수양대군의 딸이 아니었다면. 수양대군의 딸이더라도 수양대군이 왕위를 노리지도, 김종서와 적대하지도 않았다면. 아니 차라리 김승유를 처음부터 아예 만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가족의 목숨이 달린 일이지만 이미 김승유를 좋아하게 되어 버린 것을 어쩌란 말인가.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도 소중하지만 김승유를 향한 그녀의 감정 역시 진심이다. 어떻게 행동해야 그것을 정답이라 할 수 있을까? 아버지를 도와 김승유를 죽여야 할까? 김승유를 도와 아버지를 죽여야 할까?

 

그나마 김승유는 편한 편이다. 아직 그는 세령의 존재를 모른다. 이제서야 비로소 세령의 정체를 눈치채고 있다. 수양대군은 아버지와 형을 죽인 적이며, 신면은 그런 수양대군을 따르는 하수인이다. 아버지와 형의 죽음 만큼이나 그의 적개심은 그래서 누구보다 명확하며 흔들림이 없다. 하지만 세령의 정체를 알고 나서도 그럴까? 그의 세령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었던 만큼 그에게도 선택지가 주어질 것이다. 세령인가? 아니면 아버지인가? 당연히 아버지여야 하겠지만 사람의 감정이 의지대로 된다면 드라마같은 것이 만들어질 리도 없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내놓은 시험문제 앞에 선택을 강요당하고, 그 강요당한 선택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번민하고 후회해야 하는 이들. 시대의 비극일 것이다. 누구도 그러기를 바란 사람이 없건만 시대는 이미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누구도 그러고자 의도한 사람이 없건만 시대에 휩쓸려 어느새 자신의 앞에 놓인 답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직 그들의 세상이 아니기에. 하긴 그들 역시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는 자식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어느 하나를 선택할 것을.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일까. 어디까지가 그들의 진심이었을까. 하지만 진심이 되어야 한다. 신면은 친구인 김승유를 죽일 수 있어야 하고, 김승유는 신면을 증오해야 한다. 세령마저도 증오해야 한다. 세령은 김승유를 잊어야 한다. 아니면 가족을 잊거나. 어느 것도 진심이 아니지만 어느 하나는 진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제까지의 모든 비극을 압축해 놓은 듯한 회차였다. 김종서의 죽음과 수양대군의 반란, 정종과 김승유는 친구인 신면의 배신을 눈으로 보아야 하고, 신면은 친구들 앞에서 배신자인 자신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수양대군의 반란으로 아우인 단종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에 경혜공주는 비장하기만 하고, 비장하게 김승유를 위해 아버지 수양대군을 찾아간 세령은 김승유의 죽음 소식에 허탈하기만 할 뿐이다. 마침내 복수를 위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김승유와 그런 그의 앞에 닥친 역모의 죄를 쓰고 효수된 아버지 김종서의 모습, 그리고 원수 수양대군을 맞는 사랑하는 연인 여리 - 아니 세령의 모습까지.

 

마치 한꺼번에 모두 풀어놓으려는 듯 쏟아지는 감정이 숨가쁘기까지 하다. 수양대군의 야망과 세령의 절망과 경혜공주의 원망, 신면의 번민과 갈등, 김승유의 분노, 지금을 위해서 무려 8회라는 분량동안 이야기는 진행되었던 것이고, 이제 이것을 기점으로 나머지 이야기들이 시작될 것이다. 김승유가 증오를 알기까지, 그리고 그 증오의 대상 가운데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알기까지. 비로소 세령이 김승유와 수양대군이 양립할 수 없을 깨달을 때까지.

 

원로들의 연기가 확실히 놀랍다. 사실 죽음에 이르러 김승유를 향해 팔을 뻗는 김종서의 모습은 조금은 넘치는 느낌이었다. 굳이 그 장면을 그렇게 오래 끌 필요가 있었을까? 비장하기는 하지만 너무 긴 것이 감정을 희석시키는 느낌이었다. 조금 더 간결한 연출이었으면 어땠을까? 죽으면서 김승유를 한참을 눈에 담다가 눈을 감는다. 그러나 역시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여전히 강직한 호랑이 김종서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리고 김영철 역시 잔혹한 야심가인 수양대군을 연기하면서도 딸인 세령에게 경멸받는 순간 느끼는 자괴감과 모멸감을 섬세하지만 선 굵게 표현해 보이고 있었다. 한 나라의 왕위를 노리는 야심가와 그리고 딸로부터 존경받고 싶은 아버지 사이의 갈등일까? 어쩌면 앞으로의 전개를 위해 필요한 장면일 터다.

 

마침내 계유정난에 성공한 수양대군의 독주와 그에 복수하고자 하는 김승유의 활약, 더불어 단종을 지키려는 경혜공주와 정종의 노력, 여기에 김승유의 생존을 알게 된 세령의 갈등까지. 신면은 또한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필 그 절박한 순간에 경혜공주의 손가락에 자신이 전한 어머니의 가락지가 끼어 있지 않음을 발견한 정종의 마음 또한 애닲다. 경혜공주와 단종을 위하려 노력을 기울여 보지만 이미 대세는 정해져 있고 그는 무력하기만 하다. 친구의 변절도 보아야 하고. 더욱 감정이 고조되며 드라마가 긴박하게 돌아간다.

 

아무튼 결국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시절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니.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모두 신숙주와 오랜 교분을 나눈 사이였다. 그러나 성삼문이 죽었을 때 그의 어린 손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유성원의 일족 유자미와는 달리 신숙주는 친구들을 위해 그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었다. 하기는 한명회는 친구인 권람의 외손녀가 남이가 역모로 죽임을 당하면서 노비로 전락하자 그것을 받아 면천을 허락하지 않았었다. 그런 무리들이었다.

 

시대의 슬픔. 젊은이들의 눈물일 터다. 나름대로 명분도 있고 그에 따른 정의도 있을 터이지만, 기성세대의 사정이 젊은이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사랑조차 죄가 되어야 하는 비정한 시대. 마침내 세령의 진실을 알게 된 김승유의 반응이 기대된다.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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