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사랑하기에 차라리 죽이고 싶다. 역설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세령(문채원 분)을 원망하는 마음만 있었다면 김승유(박시후 분)는 한 마디 말도 없이 다짜고짜 그녀의 목을 조르려 했을까? 마음이 정리된 뒤라면 오히려 원망의 말이라도 내뱉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목이 저자에 효수되어 있는 것을 보고 수양대군(김영철 분)을 죽이겠다고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러나 정작 수양대군의 딸이 되어 있는 세령을 보고 그는 더 이상의 생각을 이어가지 못한다. 수양대군을 죽이겠다고 칼을 들고 달려들었지만 그의 몸짓에는 아무런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고, 마침내 수양대군의 부하들에게 잡혔을 때도 그의 눈은 세령만을 향하고 있었다.
수양대군을 원망해야 했다. 수양대군과 그 일당에게 증오를 품고 복수를 다짐했어야 했었다. 하다못해 다른 감옥에 갇힌 사람들처럼 욕이라도 퍼부어야 했다. 자신을 배반한 친구 신면(송종호 분)을 보면서도 아무런 말조차 못하고, 또다른 친구 정종(이민우 분)이 찾아왔는데 아예 그를 알아보지조차 못한다. 그저 짐승처럼 울부짖기만 할 뿐. 왜일까?
아마 김승유의 속은 마치 활화산처럼 들끓고 있을 것이다. 수양대군에 대한 증오와 아버지와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모두가 죽었는데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하지만 무엇보다 아버지와 형을 죽인 원수인 수양대군의 딸 세령에 대한 끊을 수 없는 미련이었다.
원망할 수라도 있었다면. 미워할 수만 있었다면 그것을 디딤돌삼아서라도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망나니의 칼이 자신을 향하는 그 순간에조차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기는 그리 사랑하던 사이인데 마음의 정리가 끝났다면 하다못해 감정이 담긴 가시돋힌 말 한 마디라도 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째서 자신을 속였는가. 진정 수양대군의 딸이었는가. 당신을 원망한다. 당신을 증오한다.
하지만 김승유는 무엇에 막히기라도 한 듯 말 한 마디 없이 그저 쫓기는 사람처럼 세령의 목을 조를 뿐이었다. 세령이 반항할 것이라는 생각조차 없다. 마치 꿈을 거닐듯이.
맞다. 지금 김승유는 꿈을 꾸고 있다. 지금 김승유가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은 현실의 세령이 아니다. 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세령이다. 여전히 그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써. 그러나 그녀를 죽여야 한다. 그녀를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이끌리듯 그래서 김승유는 세령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녀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세령은 그것을 김승유에 대한 속죄라 생각하지만 김승유에게는 더 이상 세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예지와도 같았다. 어떻게든 세령을 죽이고자 하는 김승유의 시체같은 눈빛과 그런 김승유에게 차라리 죽고자 하는 세령의 죽어버린 눈빛, 그러나 죽이고자 하는 것은 죽일 수 없기 때문이고 죽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라도 함께 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 간절함. 그 절박함. 결코 서로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이이기에.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수양대군이 만든 피의 강이 흐르기 시작한 순간 두 사람은 결코 이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 사람은 사랑을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는 비극일 것이다. 많은 사랑이 끝내 비극을 예감하면서도 운명적으로 불타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인 것이다. 머리로는 더 이상은 안 된다 말하겠지만. 머리로는 절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다 말하고 있을 테지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뜻대로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그래서 부나방처럼 뛰어들고 만다. 그래서 비극적인 사랑이란 그토록 아름답다. 촛불에 어느새 불타오르기 시작한 부나방처럼. 그렇게 김승유와 세령은 타오를 것이다. 비극이 되었든 희극이 되었든. 이미 사랑하기 시작했으므로.
자신이 이미 한 선택에 대해 후회따위 않으려는 것은 신면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인 이개(엄효섭 분)가 찾아와 한 소리 타일렀을 때 그러나 신면은 자신의 속을 꿰뚫어보는 스승의 타이름에 오히려 더욱 단호하게 김승유의 죽음을 지시하게 된다. 수양대군의 질책에도 여전히 혼란스럽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던 그이건만 이개의 말이 도리어 불을 지펴버린 듯하다.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이미 저지른 일이기에.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릴수도, 그가 저지른 일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도 없다.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가문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이라 말한다. 단지 변병일 뿐이라고. 그러면 이제껏 그가 해 온 일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려는 발버둥이기도 하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절대 틀리지 않았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 세 번은 더 쉽다. 사람이 쉽게 타락하는 이유다. 사람은 항상 자기가 옳다고 믿고 싶어한다. 자기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미 잘못을 저질렀다. 어찌하겠는가? 이미 바지를 적셨으니 물로 들어가야 한다. 몸이 젖었으니 기왕에 물에 들어간 것 옷을 벗고 멱을 감는다. 이제라도 다시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그저 알지 못하는 이들의 맘편한 생각일 뿐. 그만큼 신면의 상처도 깊다. 신면의 김승유와 정종에 대한 우정이 진짜였기에 그의 행동은 더욱 극단을 치닫는다.
그러고 보니 제목이 공주의 남자다. 경혜공주(홍수현 분)의 남자는 정종일 것이다. 장차 수양대군이 세조가 된다면 공주가 될 세령에게도 김승유와 신면이라는 남자들이 있다. 김승유는 세령이 사랑하는 이이고, 신면은 세령을 사랑하는 이일 터다. 그네들의 엇갈림. 그들이 바란 바는 아니었으나 시대가 그리 되도록 그들의 등을 떠민다. 그리고 등을 떠밀린 그들은 어느새 그것이 진심처럼 더욱 앞으로 내달리게 된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어른이 되었다. 이제까지 세령은 단지 철없는 소녀에 불과했다. 하지만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를 지켜야 하는 입장이 되었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수양대군을 죽이려던 김승유가 잡혀가고 세령이 울부짖으며 절규할 때 그녀를 향해 치켜올려진 어머니의 손이 이내 포옹으로 바뀐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부모에 의해 죽게 될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던지려는 딸을 보는 부모의 마음이란 어떤 것이겠는가. 단종이 김승유를 비롯한 정난의 피해자들의 가족을 살리려 했을 때 수양대군이 굳이 그들을 죽이겠다 고집하지 않은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수양대군이 진정 죽이고자 했다면 김승유 하나 죽이지 못했을까.
남의 사람이 되어 버린 딸에게. 품 안의 자식인 줄 알았더니 이제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그를 위해 살아가는 여인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가엾다. 그렇다고 되돌릴 수도 없다. 칼을 목에 대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김승유를 살리고자 하는 세령의 의지가 당당하면서도 가련하기 그지없는 것은 그래서다. 의지할 곳 없이 그녀는 혼자서 사랑해야 한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른이라는 것일 게다.
김승유도 그래서 아버지 품안의 막내에서 어느새 어른이 되어 깨어나려 한다. 아버지와 세령 그 무엇도 포기할 수 없고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 없을 때 그는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나려 한다. 세령과의 마주침으로 깨어나게 될 것이다. 그를 절망과 혼란으로 밀어넣은 세령의 실체를 대함으로써. 여전히 그의 앞에 남아 있는 현실의 무게를 깨달으며. 이대로 죽음과 망각으로 도망치기에는 그에게 걸려 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성장기였을까? 예고편이 끝나고 세령과 김승유가 처음 만나던 순간이 다시 보여졌을 때 애잔함마저 느끼게 되는 것은 그래서였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나면 다시 아이로는 돌아갈 수 없다. 그 순수하고 꿈많던 해맑은 시절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더구나 주위에 의해 강제로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야 했을 때 손에 잡힐 듯 남아 있는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그래서 더한 아픔이다. 그그렇게 걱정없이 웃고 떠들던 시절이 있었는데. 아주 먼 이야기같이.
논란이 되었던 8월 18일 10화의 초반 15분 분량은 바로 그를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전날인 8월 17일 9화는 계유정난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끝은 김종서와 조정의 대신들이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난에 의해 모두 죽고 난 뒤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10화에서는 그렇게 계유정난을 겪은 김승유, 세령, 신면 등이 맞닥뜨리는 이후의 현실이었다. 9화에서 김종서가 죽고 김승유가 수양대군의 사저에서 세령을 보게 되기까지가 아주 짧고 간략하게 묘사되었다면, 그래서 10화에서는 그 사이의 과정을 디테일하게 보여주게 된다. 마치 김승유가 겪게 될 비극을 점층적으로 심화하여 보여주려는 듯.
그야말로 각성이었을 것이다. 일깨움. 철없는 아이에서 어른으로. 부모의 품에서 세상으로 내던져진다. 김승유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그리고 세령은 존경하던 아버지의 혐오스런 모습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나면 아이는 부쩍 어른이 된다. 그를 위한 회차였을 것이다.
마치 이 장면을 위해 이제까지 달려 온 것처럼. 그렇게 김승유와 세령은 다시 감옥에서 만난다. 그리고 감옥에서 서로 죽이려 하는 의지와 죽임을 당하려는 의지로써 마음은 교환한다. 사랑하기에도 가혹한 시절이기에. 차라리 죽이려 하고 죽임을 당하려 한다. 비극은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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