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내사랑 내곁에 - 너무 선량해서 악할 수 있음을...

까칠부 2011. 8. 21. 10:24

사실 드라마나 영화 같은 데서 흔히 보게 되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아니 일상에서도 숱하게 본다.

 

악인이 있다. 악인이 있어 패악을 저지르며 주위에 큰 피해를 입힌다. 자신도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누군가 찾아와 묻는다. 이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느냐고. 그때 침묵한다.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더 이상의 피해는 당하고 싶지 않으므로. 더 이상 악과 대적함으로써 자기에게 피해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으므로. 그래서 악을 방치하고 용납하게 된다. 그로 인해 더 많은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고통을 받게 되더라도. 나는 단지 선량한 피해자라고.

 

고석빈(온주완 분)의 사주로 도미솔(이소연 분)이 납치되었다. 그로 인해 봉선아(김미숙 분)는 고진국(최재성 분)과의 결혼식 직전 결혼식장을 빠져나와야 했었다. 그로 인한 온갖 비난과 무엇보다 고진국에 대한 미안함. 하지만 심지어 고석빈이 모든 일을 꾸몄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미솔은 입을 다물기로 한다. 혹시나 그로 인해 돌아올 피해를 막기 위해.

 

당연한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므로. 그로 인해 정작 고진국이 입게 될 상처 따위 안중에 없는 것이다. 아니 미안하기는 할 것이다. 죄스럽기도 할 것이다. 심지어 언론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거짓말까지 해가며 기자들 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그 순간 느끼는 미안함과 죄스러움, 무엇보다 그로 인한 양심의 고통으로 상쇄되고 만다.

 

역시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최선이다. 그래서 엄마 봉선아와 딸 도미솔을 지킬 수 있었으므로 모든 것은 잘 된 것이다. 이를테면 고진국에게 응석을 부리는 꼴이다. 우리가 이렇게 말 못할 어려운 처지에 있으니 조금 부당하고 곤란한 일을 겪게 되더라도 보아달라. 그에 대해서조차 미안해하고 죄스러워하며 자기를 연민하면서.

 

사실 그것은 고석빈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다. 도미솔이란 고석빈에게 있어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순수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도미솔을 납치하기까지 하다니. 그것은 고석빈 자신에게도 상처가 될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으므로.

 

항상 고석빈이 되뇌던 말이었다. 그리고 그 말 한가운데에는 항상 어머니 배정자(이휘향 분)가 있었다. 어머니 때문에. 어머니를 위해서. 자기가 결정하여 도미솔을 납치해 놓고도 그래서 고석빈은 여전히 어머니를 원망한다. 아들이기 때문에. 어머니가 아들인 자신만을 바라보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가 바라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쩔 수 없노라고. 그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대해서조차 어머니에게 탓을 돌리며 가련한 자신을 연민한다.

 

하기는 그래서 더욱 고석빈은 도미솔에게 집착하는 것이다. 어머니로 인해 포기해야만 했던 도미솔이야 말로 고석빈에게 있어 자기에 대한 연민 그 자체였을 터이니. 미안해하고 죄스러워한다. 그에 대한 책임으로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면서 더욱 깊이 깨닫는다. 자기는 순수했다. 자신은 더없이 선량하고 순결했다. 단지 어쩔 수 없이 그런 선택을 했을 뿐이다. 그런 자신이 안타깝고 그래서 그런 도미솔이 안쓰럽다. 그래서 그는 또한 도미솔이 행복을 찾아 떠나는 것을 용납지 못한다.

 

가장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어쩔 수 없어서. 미안한데. 죄스러운데. 잘못인 걸 아는데. 그래서 사과하면서. 잘못을 빌면서. 그리고 그런 자신을 불쌍히 여긴다. 가해자이면서 그 자신은 언제나 피해자일 뿐이다. 그래서 스스럼없다. 더 거침없이 극단을 선택한다. 그런 모든 행위들에 대해서마저 그는 이미 자기를 위한 변명을 마련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배정자의 경우는 오히려 순수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굳이 자기연민따위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녀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근거는 오직 한 가지다. 필요. 다른 말로는 욕심이다.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이 그녀는 오로지 자기가 바라는 것만을 보고, 그것을 가져야 하는 당위를 보고, 오로지 그것 한 가지에만 충실한다. 감당 못할 일이면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단지 후회할 일이 생기면 새로운 욕심을 가질 뿐이다. 고진국과 봉선아의 결혼을 그토록 깨려 했고, 결국 깨진 것을 기뻐하면서도 그와 관련해 고석빈이 무언가 했으리라 생각지 못하는 이유인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행동원칙에 어긋난다.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해맑게 악을 저지르는 배정자와 철학자와도 같이 온갖 번민과 후회 속에 그러나 악을 선택하고 마는 고석빈, 조윤정(전혜빈 분)은 오히려 배정자와 닮았다. 배정자가 부모의 부재 속에 어른이 되지 못한 채라면, 조윤정은 너무 곱게 자라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고석빈과는 다른 형태지만 스스로 죄인이 되어 고통스러워하며 그것으로써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너무나 선량한 봉선아와 도미솔.

 

너무 착한 때문이다. 너무 선량하여 감히 자기 앞에 놓은 장애를 스스로 극복할 생각조차 못한다. 타협하는 것이 선이며, 양보하는 것이 정의다. 굳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아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모두가 잘 풀릴 수 있다. 세상 인심의 선의를 믿어서라기보다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때문이다. 용기란 어쩌면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믿지도 않으면 이해해달라는 어리광이야 말로 봉선아와 도미솔을 정의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민폐다. 굳이 피해를 끼치려 그런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자기 탓을 하며 그것으로 책임을 대신한다.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조차 없다. 그저 이대로만 별 탈 없이 지나갈 수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을 소시민이라 하는 것일 게다.

 

하여튼 너무 뻔하게 진행되어 이번에는 흥미를 많이 잃었다. 설마 했다. 도미솔이 고석빈의 아이를 낳고, 고석빈이 조윤정과 결혼했으며, 아직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배정자가 도미솔과 고석빈 사이에서 태어난 봉영웅에 대해 혈육의 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 설마 고석빈과 조윤정 사이에 아이가 없어서 다시 봉영웅을 두고 갈등이 생길까?

 

하필 조윤정의 임신사실이 알려진 그 순간 고석빈은 자신의 불임을 전해듣게 된다. 고석빈이 불임이라면 조윤정이 임신한 아이는 고석빈의 아이가 아닐 것이다. 어차피 큰아버지 고진국에게 양자로 줄 아이였으니 크게 상관은 없을 테지만 자기연민에 빠지는 인물인 만큼 그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은 더없이 클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이상 가질 수 없게 된 자신의 아이 봉영웅에 대한 집착 또한. 고석빈은 과연 어디까지 가게 될 것인가. 배정자는 역시. 그리고 조윤정의 선택은.

 

여전히 봉선아와 도미솔은 침묵할 것인가. 고진국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면서도 단지 자기 연민에만 빠져 그것을 외면하려고만 하겠는가. 엄마를, 그리고 딸을 지키기 위해 고진국의 아픔을 그저 지켜보려고만 하겠는가. 그리고 우연히 정말자(사미자 분)와의 친구라는 인연으로 고향후배 공옥순(서승현 분)을 만나게 된 강정혜(정혜선 분)의 선택 또한. 그녀는 자신의 잃어버린 외손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확실히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작위적인 설정이나 상황들이 많다. 일그러져 있고 왜곡되어 있다. 막장에 가깝다. 하지만 항상 말하듯 그 과정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봉선아와 도미솔 역시 마냥 선량한 피해자만은 아닌 것이다. 선량한 피해자이기에 선량한 가해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와 고석빈과의 접점에 대해서도.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악인 것인가.

 

여전히 짜증나도록 재미있었다. 그만큼 드라마에 이입해 있었다는 뜻일 게다. 주인공이고 뭐고 도미솔이 옆에 있으면 한 대 때려주고 싶었을 정도이니. 너무 진지해졌다.

 

꼬이고 꼬인 가운데 갈등이 더욱 깊어진다. 기대와 흥미도 커진다. 재미있어진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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