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일 것이다. 김승유의 비극이다. 김승유(박시후 분)는 실제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역사속의 김승유는 분명 그 시대를 살아갔던 실존인물이었을 테지만, 드라마 속의 김승유는 드라마를 위해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의 캐릭터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허깨비와도 같다. 김승유와 세령(문채원 분) 커플을 일컫는 별명처럼 그들은 실재하지 않는 유령이었다. 무엇도 만질 수 없고 그 어느 것도 바꿀 수 없다. 설사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정을 나누더라도 하룻밤 꿈처럼 깨어나면 산산이 흩어질 뿐이다. 마치 경혜공주(홍수현 분)와 정종(이민우 분)이 함께 유배를 떠나는데 은근슬쩍 유배길에 끼어들어도 눈여겨 보는 이 하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어쩌면 - 아니 세령과 함께 그들은 어쩌면 수양대군(김영철 분)과 신면(송종호 분)과 경혜공주, 정종 등이 꾸었던 아주 고약하고 아름다운 꿈이었는지 모른다. 깨고 나면 기억조차도 남지 않는 아련한 꿈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 무엇도 할 수 없다. 아무리 의지를 다지고 일을 꾸민들 무엇하는가? 그리 발악을 해보고 발버둥을 쳐봐도 돌아오는 것은 그와 무관하게 흘러가는 역사의 엄정함 뿐이다. 그가 이미 스승인 이개와 성삼문 등과 행동을 함께 하기 전에 그 실패는 결정지어져 있었고, 신면의 온정에 힘입어 그들의 탈옥을 돕고자 감옥으로 침입해 들어갔을 때도 그들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그토록 수양대군을 죽이려 했건만 수양대군을 실제 죽이는 것은 병이 아니던가. 차라리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에게는 그렇게 억척을 떨었던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 김승유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던가. 세령 역시 단지 야담집에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존재가 남아 있지 않다. 그것부터가 사실 비극의 시작이다.
아마 이 부분이야 말로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이미 모든 결론은 나와 있다. 계유정난이 일어나 김종서와 그를 따르는 관료들이 죽임을 당하고, 수양대군에 의한 찬탈이 이루어지고, 사육신의 모의를 계기로 단종이 끝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그리고 마침내는 죽게 되리라.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조차 없이 너무나도 상세한 기록은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가를 생생하게 후대의 우리들에 전해준다. 그런데 그런 역사적 사실 가운데 김승유와 세령이라는 허구의 존재를 살아가게 해야 한다. 그 시대를 살아가되 그러나 그 시대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존재하되 존재해서는 안 되며,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해야 한다. 아마 이와 같은 가상역사물에 있어 그 완성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훌륭하니.
필자가 항상 이 드라마 <공주의 남자>에 감탄하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그를 위해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에 대해서 상당부분 손을 보고는 있었다. 허구의 존재를 실재하는 것처럼 묘사하기 위해 상당한 사건과 인물들을 그들응 중심으로 재배치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과장하고, 어떤 것은 축소하며, 어떤 것은 생략하며. 시간대도 뒤죽박죽이다. 하지만 꿈이란 항상 있었던 그대로만 꾸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럼으로써 김승유와 세령은 생명을 얻고 그들의 말과 행동은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 속에 의미를 갖는다. 대범함일까? 대개는 역사라는 거대한 서사에 짓눌려 그를 따라가기 마련인데 드라마는 철저히 김승유와 세령을 중심으로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절묘하게 넘나든다. 이제는 과연 김승유와 세령이 실존인물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다. 어쩌면 그 시대 기록에만 없을 뿐 김승유와 세령이 살아 드라마처럼 그렇게 살아가지 않았을까? 수작이라는 말조차 미안할 정도다.
아무튼 오랜 그리움과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애태우고, 안타까워하고, 절망하고, 좌절하며, 원망하고, 분노하고, 그러면서도 인내하며 속으로 삭이고. 오랫동안 서로를 보지 못하고 서로 정다운 이야기 한 번 나누지 못한 채 단지 그리워하며 기다른 시간들이 그 얼마이던가. 그리고 아직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며 그리고 앞으로의 기다림에 대한 약속일 것이다. 빙옥관을 나서는 김승유더러 기다리겠노라고 말하던 세령처럼. 돌아오면 함께 떠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던 김승유처럼.
비극일까? 그러나 이대로 비극으로 끝내기에는 서로 함께 하는 행복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 행복이 클수록 비극도 커진다. 이대로 비극으로 끝내기에는 그들의 사랑이 너무 애처롭지 않은가. 서로를 제대로 안아보지도 못하고. 다정한 말조차 나누어 보지 못하고. 하다못해 따뜻한 밥이라도 지어 먹이고 싶다. 싸구려 장신구라도 건네어 꾸미게 하고 싶다. 그것은 어쩌면 세령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김승유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누구도 믿지 못하고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방황하던 그가 마침내 지친 몸을 세령의 어깨에 기대어 쉬었다. 시청자 역시 김승유와 더불어 이 짧은 행복을 마음껏 누리게 된다. 참으로 아름다운 한 쌍 아니던가.
그러나 김승유는 아직 편안히 몸을 쉴 때가 아니다. 수양대군을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토록 하기 위해서는 아직은 더 분주하게 뛰어다녀야 한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 끝날 때가 아니기에 다시금 두 사람에게는 시련이 주어진다. 짧은 행복 끝에 헤어짐과 그리고 아버지 수양대군에 의해 노비로 전락하는 비참한 상황이. 진정 김승유가 세령의 품에서 몸을 쉴 때면 더 이상 남은 이야기가 없게 된 뒤가 아니겠는가. 선물이라 본다. 김승유와 세령을 위한. 그리고 지금껏 지켜봐 온 시청자에 대한. 그리고 말했듯 약속이다. 다시 만나리라. 마지막에 한 번 모두가 다시 만나게 되리라.
경혜공주와 세령의 운명의 엇갈림. 처음에는 경혜공주가 공주였고 지금은 세령이 공주다. 처음에는 경혜공주가 그리 강해 보였고, 지금은 세령이 더 강해 보인다. 경혜공주에게는 지켜야 할 대상이 남편까지 더 늘었고, 세령에게는 지켜야 할 대상이 김승유 한 사람으로 좁혀지고 있었다. 원래 경혜공주는 그렇게 강한 여성이 아니었을 터다. 세령 역시 그렇게 나약한 여성이 아니었다.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경혜공주를 강하게 만들었고, 남편 정종을 지켜야 한다는 강함이 그녀를 나약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품에서 세령은 철없는 아가씨였다면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났을 때 당당한 한 사람의 여성이 되었다. 참 기묘한 운명을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두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함으로써 강해진다.
수양대군의 원죄는 그가 약하다는 데 있다. 그가 조금만 더 강했다면 자신의 권력에 대한 야심을 다스릴 수 있었겠지. 정의롭다는 것은 용기가 있다는 것이다. 착하다는 것은 누구보다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단지 충동에 이끌려 행동에 옮기고, 누군가는 그럼에도 그것을 이기고 보편의 가치를 쫓는다. 수양대군은 강한 사람이었을까? 그렇다기에는 딸로부터 외면당한 데 대한 충격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딸을 노비로 삼겠다 선언하는 그 순간 그의 모습은 아버지로서도 너무나 약한 모습이었다. 그는 딸조차 이기지 못한다.
신면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그토록 김승유에 집착하며 증오를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그로 인해 그는 배신자가 되었다. 정작 배신을 한 것은 신면 자신이지만, 그러나 김승유가 배신을 당함으로써 신면은 배신자가 되었다. 논리적으로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궤변이지만 그런 것은 이미 신면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선택으로 인한 책임, 잘못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고 하는 회의와 번민에 대한 전가였을 것이다. 그가 세령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세령조차 얻지 못한다면 그의 배신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오히려 세령에 집착할수록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됨에도,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욱 세령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분풀이로 빙옥관을 부수던 그 모습처럼. 진정 죄가 있다면 모두 끌어다 역모의 죄로 죽일 일이지 그런 식으로 패악질을 부릴 것은 아니다.
이미 모든 갈등과 번민을 끝내고 선택을 마친 세령의 당당함과 오히려 쫓기는 듯 초조하여 과격해지는 수양대군과 신면. 그에 비하면 역시나 쫓기는 듯 초조하던 김승유는 평안을 얻는다. 그 역시 오랜 방황을 끝내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선택했다. 자신에 부끄럽지 않은 길을. 신면의 세령에 대한 분노에는 그와 같은 질투도 있었으리라.
결국 세령은 노비로 전락하고. 노비로 전락한 세령을 얻는 것은 그가 바라던 것이 아니다. 그가 진정 바란 것은 온전한 세령을 자신의 여인으로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사랑하는 여인마저 노비로 전락케 하고 만다. 그러고서도 세령을 얻었다 한다면 그는 이미 더 이상 신면이 아니게 되겠지. 그는 당당하고 싶고, 정의롭고 싶고, 그리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과연 그의 선택은? 역사의 기록 때문이 아니라 신면의 비극을 예감하는 이유다. 이미 그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들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어느새 세령을 연민하여 받아들이는 경혜공주와 김승유의 형수 역시. 그들의 한도 결코 얕지는 않을 텐데. 그러나 세령에 대한 작은 분노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수양대군에 비해 그네들의 한서린 가슴은 모든 것을 포용하듯 넓기만 하다. 그런 것을 그릇이라 부른다. 문득 세령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김승유의 표정에도 여유가 흐른다. 누가 행복하고 누가 불행한 것인가? 드라마의 주제가 아닐까? 누군가는 악할 수밖에 없고 누군가는 선할 수밖에 없다.
간만의 휴식같은 즐거운 이야기였다. 짧았지만 아련한 꿈을 꾸고 일어난 것 같다. 다시 행복할 수 있으면. 아강이의 잔소리를 들으며 밥을 짓고 찬을 만들고 빨래를 널고. 땀투성이 흙투성이가 되어서는 돌아오마는 약속을 웃음과 함께 지키고. 비극은 깊다. 숨을 깊이 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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