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 것이다. 뭣한다고 옛날 사람들은 그토록 장자계승에 집착하고 있었는가? 장남 이외의 아들 가운데서도 유능한 아들이 있었을 텐데. 아니 신하 가운뎃도 유능한 신하가 있었을 수 있다.
그래서 로마가 그 모양이 되었다. 로마의 가장 큰 문제가 그것이었다. 장자승계가 안 되고 있었다는 것. 그렇다 보니 실력자들이 너도 나도 황제가 되고자 실력행사에 들어가고, 로마의 거대한 힘은 그렇게 황제자리를 둔 군벌의 다툼으로 인해 소진되어가고 있었다. 동로마제국의 쇠퇴도 마찬가지다.
당장 조선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죽었다. 계유정난으로는 김종서와 황보인, 그리고 그와 연루되어 이징옥이 반란을 일으켰다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사육신에 의한 1차 단종복위운동으로는 집현전 학자 다수가, 2차 단종복위운동으로는 다시 수많은 선비와 관리, 그리고 무고한 백성들이 죽었다. 만일 계유정난이 없었고 이들이 끝까지 살아 있었다면?
그래서 태종은 양녕대군이 그리 패악을 부렸어도 끝까지 그를 세자로써 포기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자신이 원칙을 어기고 힘으로 왕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그래서 장자계승의 전통을 확립하고자 양녕대군을 끝까지 고집했던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세자의 자리에서 밀려난 것을 보면 양녕대군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자기 아들의 여자마저 빼앗은 인간이 바로 양녕대군이다.
그렇게 결국 양녕대군이 갖고 있는 태생적인 흠결로 인해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로 왕위가 이어지고, 그러나 그로부터는 단종에 이르기까지 적장자 계승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물론 그것은 어린 나이에 문종을 세자로 책봉하여 자신의 일을 돕도록 했던 세종의 배려가 크게 작용했다. 사실상 세종의 치세 말기는 거의 문종의 섭적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그리고 이미 이때 세종은 단종에게 왕위가 이어지도록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당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성삼문이 신숙주를 질책하여 욕하는 이유다. 아니 신숙주가 한명회와는 달리 배신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이유일 것이다. 그는 세종과 문종의 고명을 들은 처지였다.
그런데 그것을 다름아닌 세조가 허물어 버린 것이다. 힘으로 왕위를 빼앗고 반대하는 자를 쳐죽이고. 아직 혼란스러워 힘에 의한 질서가 필요하던 때도 아니었다. 이미 안정을 찾고 있던 때였고 적장자계승의 원칙이 지켜지며 보다 오랜기간 평화가 이어질 것이 예상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시기 세조가 죽인 인물들은 세종과 문종이 공들여 길러낸 조선의 브레인들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태종과 세조가 다른 이유다. 태종은 그나마 명분이 있었다. 아직 질서가 잡히기 전의 혼란기였다. 그러나 세조는 명분도 없었고, 이미 안정을 찾아가던 시점이었다. 태종에게는 정당성이 있었지만 세조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그래서 과감하게 공신을 정리할 수 있었던 태종에 비해 세조는 끝까지 공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죽이고 또 죽이고, 그러면서 공신들에게는 막대한 특혜를 안기고. 그것이 결국 성종의 성세를 지나 연산군대에 곪아 터지게 된 것 아니던가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훈구세력들이 명종 때까지 조선을 쥐고 흔든다.
명분이 없이 왕위에 올랐으니 반대자들을 끌어들이고 방관자들의 지지를 얻어내자면 어찌해야겠는가? 그래서 당시 공신으로 책봉된 이가 수천을 넘는다. 하여튼 별 이유로도 다 공신이었다. 그리고 퍼주었다. 세종이 세운 연분구등의 원칙이 무너진 것이 이때다. 이후 연분구등은 가장 낮은 하하하로 통일되어 거둬지게 되는데, 그것은 지방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사대부들을 회유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는 결국 조선의 재정이 취약해지면서 이미 중종 때에 방군수포의 폐단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더구나 이들 공신들에 의한 토지의 약탈과 겸병이 잦아지게 되니 이 또한 백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생각이 없어서 장자계승의 원칙을 세워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장자보다 차자가 더 나을 가능성도 있다. 신하 가운데 더 뛰어난 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서로 왕이 되려 하면 다툼이 일어난다. 처음 왕조가 세워질 때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다 보면 왕조는 쉽사리 약해져 멸망에 이르고 만다. 멸망하는 것이야 자기 사정이라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을 백성들은 어찌하란 말인가. 그래서 장자계승의 원칙을 세우고, 대신 관료들로 하여금 왕을 보필하게 만든다. 그것이 유교에서 받드는 이상적 정치관이었다. 오히려 덕이 있다면 무능한 것도 나을 수 있다는 주의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달까? 명이 바로 그게 안 되어 망하고 말았고. 그 원인도 역시 성조 영락제의 찬탈에 있을 것이다.
세조가 찬탈에 성공한 이후 이후의 사대부들이 정작 세조에 대해 이렇다 할 비판을 않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세조의 찬탈을 부정하면 이후의 왕권조차 부정해야 한다. 그래서 사대부들이 내세운 대안이 당시 희생된 이들의 복권이었다. 단종과 사육신, 김종서. 왕권이 안정되어야 나라가 안정된다.
정작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는가에 대해서는, 예종의 즉위와 성종의 즉위가 바로 한명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종이 어려서 즉위하며 그를 대신해 정치를 맡은 것이 바로 공신들인 원상들. 그나마 세조 이후 가장 성세를 이룬 것이 성종의 적장자였던 연산군의 즉위 이후이고 보면, 그조차도 결국 비대해진 훈구세력과 어느새 조정에 진출한 사림, 그리고 왕권의 충돌로 막장에 이르고 만다. 중종반정 이후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자세히 쓰기에는 이게 또 너무 방대한 이야기라. 아무튼 너무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닌가. 왕위를 둔 다툼이야 언제든지 있어왔지만,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 원칙은 적장자계승과 왕권의 안정이었다. 그것은 왕조가 추구해야 할 당위였었고. 그것을 세조는 깨었다. 과연 변명할 수 있을까? 그로 인해 죽은 사람이 얼마이며, 그로 인해 소모된 기회비용은 또 얼마인데.
원칙이 괜히 원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상이 괜히 이상이 아니다. 지켜야 하기에 원칙이다. 지켜져야 하기에 이상이다. 그것을 어긴다면 그것은 어찌되었거나 잘못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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