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일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예능은 예능일 뿐...

까칠부 2009. 12. 30. 15:09

소통의 전제는 동의다. 친구와 이야기할 때 먼저 듣겠다는 동의가 없으면 그건 그냥 소음에 불과할 뿐이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겠다 동의할 때 단순히 공기의 파동에 불과하던 이야기들은 색을 갖고 형체를 갖고 어떤 이미지로서 내게 들려온다.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허구다. 시나리오작가가 만든 가상의 이야기이며, 등장인물들이란 배우가 연기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울고 웃으며 등장인물들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화내고 기뻐하고 긴장하고 두려워한다. 왜? 그러자고 동의를 했으니까.

 

말하자면 극장의 문 이쪽과 저쪽은 허구와 실제의 경계라 할 수 있다. 돈을 지불하고 표를 끊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관객은 현실의 공간에서 허구의 공간으로, 허구를 실제로 여길 것에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굳이 방송시간에 맞춰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을 고정시키는 순간 시청자는 무언의 약속을 하게 된다. 화면을 통해 보여지는 것은 이 순간 만큼은 실제라. 사실이라. 그럼으로써 허구의 이야기와 허구의 인물들은 그 순간 시청자들에 실제인 양 현실인 양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냥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게 클리셰다. 기믹이다. 관객으로 하여금, 시청자로 하여금 그에 동의하도록, 그 동의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 굳이 실연을 하고 우는 위로 비가 내리는 것이나, 사랑을 하며 행복해 하는 위로 눈이 흩날리거나 꽃비가 쏟아지거나, 무협영화의 인물들이 괜히 쓸데없이 화려한 동작을 취하며 어떤 이미지를 강요하는 것이나,

 

말하자면 그것은 제작자와 시청자 사이의 계약이라 할 수 있다. 제작자는 이런 것을 보여주겠다 하고, 시청자는 그를 전제로 볼 것에 동의한다. 그러고 나면 그러한 계약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그러한 클리셰, 기믹인 것이다. 그로써 시청자는 작품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변주나 때로는 기대를 배반하는 파격에 대해서도 안심하고 동의상태를 유지하며 지켜보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 동의가 중간에 깨질 경우다. 아예 처음부터 관심이 없으면 전혀 상관없다. 어차피 SF라고는 보지 않는데 SF를 잘 만들든 못 만들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로맨틱 코미디만 보면 손발이 오그라든다는 사람에게 로맨틱 코미디가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무협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기껏 무협영화를 보러 갔더니만 그것이 기대에 못 미친다면?

 

당연히 관객은 더 이상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동의상태는 깨지게 된다. 영화는 더 이상 허구의 실제가 아닌 단순한 영화가 되어 비판의 대상이 된다. 배우의 연기가 어떻고, 감독의 연출이 어떻고, 카메라워크가 어떻고, 특수효과가 어떻고... 그건 이미 영화가 아니다.

 

재작년이던가? 기껏 영화를 보러 가서는 특수효과가 어떻다더라... 얼마나 재미 없었으면. 만일 진짜 재미있는 영화였다면 특수효과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배우가 연기를 하는지, 아니면 눈앞에 있는 것들이 진짜 실제 상황인지, 특수효과도 마치 실제인 양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고. 영화를 그렇게 영화외적으로 보려 한다는 자체가 실패한 영화라는 뜻이다.

 

그러면 당연히 비판하게 된다.

 

"이게 뭐야?"

 

재미있는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그래서 한 마디면 족하다.

 

"도무지 현실에 적응이 안돼!"

 

액션영화를 보고 나면 그리 눈빛이 살벌해지고, 멜로영화를 보고 나면 눈빛이 그리 촉촉해지고 부드러워지고, 가족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았으면 어느새 잠시 연락을 않던 가족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머리로 알아서가 아니라 어느새 동조되어 버린 감정이 그리 시켜서다. 좋은 영화들이다.

 

사실 그러자고 기껏 돈을 내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다. 특수효과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배우의 연기를 보려해서가 아니다.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현실들을, 오로지 영화를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허구의 현실들을 즐기기 위해서다. 체험하기 위해서다. 그러자고 돈을 지불하고 표를 사는 것이고, 그러라고 영화제작자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약속이 깨진다면 어떻게 될까?

 

재미없는 영화에 대한 비판은 따라서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지켜졌어야 할 약속에 대한 항의다. 당연히 지켜졌어야 할 계약파기에 대한 분노다. 영화가 보여주었어야 할 꿈에서 강제로 현실로 내동댕이쳐진데 대한 분노이며 당연한 권리인 것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

 

물론 그것도 영화를 보는 한 방법일 것이다. 누군가는 특수효과를 보려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의 연기 - 혹은 얼굴 그 자체만을 보려 영화를 보고, 누군가는 단순히 다른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다 나름의 이유이며 또한 동의다.

 

그렇지 않은가? 예를 들어 한예슬이라는 배우를 보고 싶어서 드라마를 본다. 그런데 드라마에 한예슬이 나오지 않는다. 화가 나는 거다. 나오기는 하는데 시나리오나 연출이 이상해서 전혀 한예슬같지 않고 이상하게 나온다. 물론 그럼에도 드라마에 필요한 것이라면 넘어가겠지만 그도 아니면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기대에 대한 배신이며, 그 드라마를 보고자 결심한 약속에 대한 제작자의 배신이기에.

 

마찬가지다. 역사드라마라고 해서 본다. 그런데 역사드라마가 전혀 역사를 담고 있지 않다. 화가 나는 거다. 가족드라마인데 가족이라고 온통 이상하게 그려져 있어 그야말로 콩가루에 막장이다. 화가 날 수밖에 없는 거다. 코미디를 보는데 전혀 웃기지 않고 짜증만 난다. 화를 내야 하는 거다. 리얼버라이어티라고 하는데 전혀 리얼버라이어티같지 않다. 당연히 욕부터 나올 수밖에 없는 거다.

 

그래서 비판하는 거다. 역사드라마 같으라. 가족드라마 같으라. 코미디 같으라. 리얼버라이어티 같으라. 약속을 지키라. 물론 그러다 어느 순간이 지나면 더 이상 비판을 않게 된다. 나처럼.

 

"어차피 역사드라마따위 역사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것을."

"요즘 코미디 웃겨? 그런 말장난 짜증나서 안봐!"

"그렇게 같지도 않게 오버나 하는 게 무슨 리얼? 재미있어? 안 봐!"

 

계약이 깨지면 결국 남는 건 갈라서는 것 뿐이다. 무슨 손해배상이고 뭐고 없이 정서적으로 맺어진 계약이니 등돌리고 전혀 남남으로 보지 않으면 그 뿐이다. 그래서 그러지 말자고 좋아하고 즐겨 보던 것이기에 갈라서기 전 미리 불만과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보자고. 갈라서기 전의 부부처럼.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쿨한 척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터라,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영화는 그냥 영화로만 보라!"

"예능을 왜 예능으로만 보지 않는가?"

"개그는 개그일 뿐 혼동하지 말라."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예능은 예능일 뿐이고, 개그는 개그일 뿐이고. 단, 그 전제다. 과연 드라마는 드라마다운가? 영화는 영화같은가? 예능은 예능다운가? 개그는 개그스러운가? 말했듯 그 전제가 무너졌으니 비판하는 것이라는 거다. 드라마다우라. 영화같으라. 예능다우라. 개그스러우라.

 

말하지만 문화컨텐츠란 허구에 대한 제작자와 관객 사이의 계약에 의해 성립한다. 그것이 실제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제로써 받아들이는 것. 그러도록 만들고 그렇게 보고. 그래서 영화는 영화일 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같은 계약이 깨지면? 그래서 말이 나오는 것이고.

 

문화비평이란 그런 거다. 특히 전문적인 비평가가 아닌 나같은 일반인의 비평은 더욱 그렇다. 남자의 자격을 보면서 내가 감동했을 때 그 글은 그리 길지 않다. 남자의 자격 자체를 외적으로 보기보다는 내적으로 느끼며 공감한다. 반대로 청춘불패를 비판할 때는 외적으로 비판한다. 동의가 유지되고 있을 때와 그것이 깨졌을 때의 차이다. 바로 그것이 비평의 이유인 것이다.

 

"드라마는 드라마로써만 보라."

"예능은 예능으로써만 보라."

 

이 얼마나 오만하고 무도한 소리인가? 그런데도 또 그들은 얼마나 정의롭고 자비로운가? 그러면 그 안에 내가 보아야 할 드라마와 예능은 어디 있는가? 내가 보고자 하는 드라마와 예능이란? 개인이 개인을 소외시킨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관용이 불관용이 되는 이유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유를 가지고 문화를 즐긴다.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고 만화를 읽고. 그 이유들이 충족되기를 바라며 돈을 지불하고 자신의 시간을 소비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틀어졌을 때 분노한다. 다른 누구와 상관없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해. 불필요한가? 그것들이?

 

하기는 제작자 스스로가 그따위 소리를 하고 있는 현실이라는 게 웃기기는 한다.

 

"드라마는 제발 드라마로만 봐주세요."

"예능은 예능으로서만 봐주세요."

 

내 시간을 들여 내가 드라마를 보고 예능을 보는데 그저 제작자가 보여주는대로 들려주는대로 보고 듣기만 하라? 그것으로 만족하라? 내가 왜? 무슨 이유로? 그들은 무슨 권리로? 그에 동조하는 또다른 사람들이란 또?

 

창작이란 소통이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는다?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책임이다. 귀를 기울이려 하는데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자신이 잘못한 탓이다. 그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인 것이고. 한 마디로 뭣같다는 거다. 하는 것들이. 같잖다.

 

 

 

원래는 오래전에 쓰려 했는데 어쩐지 귀찮아져서 미루다 떨이치듯 쓴다. 어차피 일반론이라 굳이 때를 맞출 필요는 없겠지. 하여튼 내가 그래서 가장 싫어하는 인종들이 착한 놈들과 정의로운 놈들과 관용적인 놈들. 개인이 개인을 소외시킨다는 것은 이런 때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하여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