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천일의 약속 - 박지형의 자기애와 무너지고 마는 이서연...

까칠부 2011. 11. 1. 12:40

김수현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일단 방송을 통해 보이는 박지형(김래원 분)을 보고 있으면 문득 한 단어가 떠오르고 만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무한한 '자기애'. 박지형이라는 인간의 본모습일 것이다. 이서연(수애 분)의 비극이다.

 

그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만을 사랑할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나 정작 누군가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끊임없이 연민하고 괴로워하며 그런 자신을 사랑한다. 일종의 사이코패스다. 그에게는 타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만이 있을 뿐이다.

 

얼핏 착각한다. 다른 사람 일로 괴로워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그러면 그러지 않으면 된다. 하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다. 그것이 자기에 이익이 되니까. 그래서 대신해서 자기를 피해자로 만드는 것이다. 자기를 희생자로 만든다. 자기 자신으로 인해 피해자로 만들고 희생자로 만듦으로써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리 말하지 말라고 했다. 개입하지 말고 물러서라 했다. 오빠인 자신도 아직 당사자가 말하지 않고 있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그러나 깡그리 무시한다. 자기에게 그 이야기를 전한 친구 장재민(이상우 분)의 입장도, 정작 당사자인 이서연의 입장 또한 역시. 그토록 사랑했다면서 이서연의 성격을 알지 못했을까? 오히려 그것이 이서연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그녀로 하여금 더욱 고통스럽게, 절망스럽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을까?

 

당연하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니까. 이서연을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한다. 이서연을 여전히 잊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그래서 말한다. 이서연을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고. 자기를 잊어도 좋다고 말하면서 끝까지 좋은 남자인 척, 이서연에게 좋은 남자로 기억되기 위해 굳이 장재민에 그 이야기를 전하라 말한다. 부모에게도 좋은 아들이고 싶고, 약혼녀인 노향기(정유미 분)에게도 좋은 남자이고 싶고, 이서연에게도 좋은 연인이고 싶다. 그러면서도 무엇 하나 포기하려 들지 않는다. 자기를 탓할 뿐. 그에게 죄책감이란 그같은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자신에 대한 구원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제멋대로다.

 

하기는 그래야 수애의 비극이 극대화될 수 있을 테니까. 참 박복한 여자다. 아버지는 일찍 죽어, 엄마는 자기들을 버리고 일찌감치 도망쳐, 동생과 둘이 남아 굶어 죽으려는 것을 겨우 고모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어려운 환경에 처음 사랑을 느낀 박지형은 언감생심, 그러나 겨우 손에 넣게 된 박지형이라는 남자는 고작 이런 수준이었다. 그녀의 고통은 아랑곳 않은 채 자기 입장만을 강요한다. 그것이 겨우 치명적인 질병으로 인해 비틀거리고 있는 그녀를 더욱 막다른 궁지로 내몰고 만다. 한 순간 그녀는 무너지고 만다.

 

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괜찮다. 아직은 환자가 아니다. 마치 자신에게만 닥치는 듯한 불행 속에 끝까지 자기를 부여잡고 버티려 했었다.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더 이상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그것은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아니 그녀의 본능이었다. 살아남기 위한. 각박한 현실에 인간으로서 자기를 지키며 살아가기 위한. 그런데 그것이 무너져 버렸다. 한 남자의 치기어린 이기로 인해. 마침내 무너지며 오빠인 장재민의 어깨에 매달려 서럽게 우는 그녀의 모습은 단단하게 두르고 있던 갑옷이 벗겨진 여린 그녀의 본모습이었다. 그는 끝내 그러한 비참한 모습마저 보이도록 강요한다.

 

어쩌면 이 드라마에서 가장 큰 비극은 이서연이 박지형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차라리 조금 더 이기적인 남자였다면. 아니 보다 더 솔직해서 그녀를 배려할 수 있었다면. 헤어질 때는 가차없이 헤어지는 것도 상대에 대한 예의일 수 있다.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할 때 상대도 더 이상 큰 혼란 없이 자기를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떠나고 나서도 그녀를 소유하고자 하는 무한의 이기만이 있을 뿐. 그런 그의 앞에 알츠하이머라는 그녀의 자존과 관련한 질병을 들킨 것은 그녀에게 있어 더 없이 큰 비극일 터였다.

 

비로소 알려졌다. 오빠에게, 동생에게, 그리고 누구보다 알리고 싶지 않았던 옛남자에게. 환자가 아니라 여겼지만 환자로 여겨지고 말았다. 아직은 괜찮다 버티고 있었지만 전혀 괜찮지 않은 취급을 받아 버렸다. 울고 있다. 원망하고 있다. 한탄하고 있다. 이제 그녀는 환자로 살아야 하는 것일까? 알츠하이머를 잃고 있는 전혀 괜찮지 않은 비정상인 채로. 위태위태한 그녀의 모습이 가슴을 졸이게 만든다. 이런 것이 멜로다.

 

참 그립다. 박지형과 수애의 회상장면에서. 오랜 멜로드라마의 고전적 낭만이 그대로 전해진다. 한없이 수줍고, 한없이 유치하고, 그래서 더 솔직한. 보고 있는 사람이 다 민망할 정도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진심과 간절함이 전해지는 듯하다. 영상마저 아름답다. 음악도 아름답다. 그래서 비극은 더욱 극대화된다. 헤어진 연인과 그 연인에게 닥친 비극. 역시 김수현의 힘인 것일까?

 

문어적인 연극투의 대사가 거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작가 김수현의 개성이며 매력일 것이다. 인생이란 마치 연극과도 같다. 연극의 한 장면처럼 - 물론 그것은 드라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일단 기본적으로 시청자와 그것이 현실의 이야기임을 전제하여 약속된다. 그러한 드라마의 가운데 마치 배우처럼 자기 안의 비극으로 파고들어 그것을 불특정의 관객들에 내던지는 누군가가 있다. 비극이 깊어질수록, 그 상황이 극적일수록, 과장되어 보여지는 모습이 비현실적인 현실감을 극대화시킨다. 김수현만이 쓸 수 있는 대사일 것이다.

 

안쓰러움일 것이다. 오로지 박지형만을 사랑하며 그와의 행복한 결혼을 꿈꾸고 있는 노향기에게 그녀가 알지 못한 채 돌아가고 있는 모든 이야기들은. 약혼자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졌고, 그 다른 여자 이서연 앞에 놓인 비극으로 인해 마치 악역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박지형을 믿고 그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노향기 그녀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나쁜 건 오로지 박지형이다. 나쁜 남자인 척도 않으니 더 나쁘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정유미를 무척 기대하게 된다.

 

기왕에 보던 드라마가 있다. 그래서 그 드라마들을 우선해 본다. 하지만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치명적인 매력이 이 드라마에는 있다. 처음 TV 드라마에 빠져들던 그 순간의 느낌이다. 사람이 있고, 사랑이 있고, 격정이 있고, 치명적인 비극이 있다. 헤어날 수 없는 운명이 있다.

 

따뜻한 가족의 이야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격정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하지만 무엇보다 운명에 지지 않으려는 약하지만 강한 인간의 이야기를 기대한다. 시련은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최적의 조건일 뿐이다. 수애에 대한 기대가 크다. 이서연은 매우 매력적이다. 좋다.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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