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계백 - 의자왕의 폭주가 시작되다!

까칠부 2011. 11. 2. 07:58

역시 의문이다. 어제는 어째서 하필 동시대 이미 당에서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있던 균전제가 아닌 무려 천 년도 전의 주나라에서 실행되었다고 전해지는 정전제인가 하는 것이 의문이었다. 그리고 오늘의 의문은 그러면 어째서 의자(조재현 분)은 그것에 반대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정전제나 균전제나, 조선후기 정약용이 주장한 여전제나 그 근간은 같다. 바로 왕토사상이다. 나라 안의 모든 토지는 왕의 소유이며, 따라서 왕이 직접 세금을 거두어 쓸 수 있도록 세금을 낼 수 있는 농민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주어 경작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까지 토지를 독점하고 백성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해 왔던 귀족들의 힘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했다. 귀족세력이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힘 또한 바로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나오는 생산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정 왕권강화를 꾀하고 있다면 의자왕으로서는 반겨할 일이지 그것을 반대할 일이 절대 아닌 것이다.

 

그러면 그렇제 좋은 것이면 어째서 역사상 많은 왕조들이 그같은 좋은 제도를 채택하지 않았던 것일까? 드라마에서도 나오고 있다. 귀족들의 땅을 빼앗아 백성들에 나누어주려 하니 당장 귀족들 자신이 반대하며 나선다. 그 반대를 무릎쓸 힘이 있어야 땅을 빼앗아 백성들에 나누어주는 것도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신라에서 이후 시행된 한자가 다른 정전(丁田)제는 모든 토지를 나누어주지 못하고 귀족이 차지하고 있는 이외의 토지에 대해서만 그 대상으로 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반발을 누를 수 있는 충분한 힘도 있어야 하고, 백성들에 고루 나누어주며 대상자의 유고시 바로 회수할 수 있는 행정력도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한 마디로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다. 그리고 역사상 그만한 강력한 중앙집권을 갖춘 나라는 고작 손으로 꼽을 정도다.

 

만일 왕인 의자가 정전제를 반대하려 하다면 그것은 기득권인 귀족의 반발에 대해 그것이 왕인 자신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해서일 것이다.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왕의 정책에 반발하여 단결하여 도전해 오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다. 충분히 힘으로 누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압도적이지 않다면 자칫 나라가 안에서부터 무너지는 빌미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역사상 더 많은 왕조들은 이들 지방세력과의 결탁을 통해 나라와 왕조의 안정을 꾀해 왔었다. 왕토사상에 입각해 백성들에 땅을 나누어주어 얻는 이익보다 귀족들을 회유하여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삼는 것이 훨씬 이익이었던 것이다. 귀족은 이후 토호나 향리, 사대부, 향신층으로 바뀐다.

 

그렇다고 의자가 귀족을 끌어안으려 하느냐? 여기에서 또 하나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도대체 의자는 무슨 힘이 있어 그토록 쉽사리 귀족들을 누를 수 있었는가? 아버지인 무왕이 그토록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서도 갖지 못했던 절대왕권이다. 그런데 단지 사택씨가 몰락한 것만으로도 의자의 분노에 귀족들이 두려움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모른다. 심지어 정사암회의를 폐지하려 하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여전히 백제의 상당수 기득권은 귀족들에게 있을 것이고, 사택씨를 무너뜨렸다고 의자의 백제 왕실에 더해진 것은 얼마 없었을 텐데 말이다.

 

아니 설사 그만한 힘이 의자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면 급조한 세력 따위 와해되기 십상이다. 어째서 성충(전노민 분)과 흥수(김유석 분)은 그와 같은 중요한 왕의 힘에 대해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일까? 왕이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손을 썼다면 급조해 만든 세력 따위 순식간에 와해되고 말았을 것이다. 정치에 밝은 이들이 어째서 그와 같은 기본은 놓치고 있었는가? 그렇게만 되었다면 의자가 다시 깨어났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역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이 왕이라는 이유로 힘을 갖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왕이 왕인 이유는 왕에 걸맞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경제력이든, 아니면 물리력이든, 하다못해 명분이라도 확고하여 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막아낼 수 있다. 힘이 없으면 오히려 시골의 부잣집 막내도련님보다 못한 것이 바로 왕이라는 자리다. 고려태조 왕건의 장남으로 고려 건국에도 공이 컸던 혜종이 어째서 그토록 무력하게 죽고 말 수밖에 없었는가? 누구보다도 정통성이 확고했고, 무엇보다 유능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를 받드는 왕규와 박술희의 세력은 서경의 왕식렴과 충주 유씨의 세력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태조의 고명조차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런데 의자는 도대체 어떤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이제까지 왕권을 농락하던 백제의 귀족을 한순간에 단지 기절해 있다 깨어난 것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가?

 

계백에게도 그렇게 대해서는 안되었다. 군사를 보유하고 있다. 백제의 어느 장수가 보유한 병사보다도 날래고 용감한 정예들이다. 왕에게 힘이 된다. 적대하면 왕의 가장 위협적인 적이 된다. 계백을 차라리 죽이거나, 아니면 계백을 끌어들여 그 군사력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거나. 자신을 왕으로 세운 공신인 성충과 흥수 역시 원래는 그의 충신이었어야 했다. 애써 자기 세력을 거리를 두어 등을 돌리게 만드는 것은 왕으로서의 패착이다. 장차 왕으로서 귀족들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하긴 그러니까 망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왕권을 강화한다고 있는대로 귀족들 들쑤셔놨으니 귀족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왕성에 고립된 채 허무하게 망하고 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의자는 무엇을 믿고 그리 무모한가?

 

폭군도 아무나 폭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의자의 처지에서 폭군이 되려 하다가는 언제 누가 죽였는지 모르게 죽고 만다. 백제의 역대 왕 가운데서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무왕 이전에 왕위에 올랐던 혜왕 역시 그 끝이 무적 의문스럽다. 힘이 있어야 폭군도 한다. 아무리 마음대로 정치를 하려 해도 그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백제의 의자왕은 무엇은 근거로 그와 같은 폭정을 휘두르는가? 귀족을 누르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끌어안으려는 것도 아니고, 자기만의 친위세력도 없었다. 성충과 흥수, 계백(이서진 분)까지 내치고 무엇은 근거로 의자는 폭군이 되려 하는가? 그저 의아할 뿐. 하지만 어차피 판타지드라마다.

 

전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기껏 왕권강화를 부르짖으며 왕의 친위세력이랄 성충과 흥수, 계백을 멀리하는 자체가. 귀족세력의 기반을 와해시킬 수 있는 정전제를 나서서 반대하고, 그러면서도 귀족들이 반발할 것을 알면서도 정사암회의를 폐지하고, 그것을 더구나 그 머리 좋다는 성충과 흥수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만다. 계백이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는 것이야 사료에 그의 이름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만다. 도대체 저들은 어째서, 무슨 이유로, 그와 같은 상황에 저리 행동하고 있는가? 그것이 타당한 것인가? 하지만 말했듯 판타지드라마니까.

 

아무튼 은고(송지효 분)의 복수는 매우 정당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대로 있었다면 은고는 아들 효와 함께 죽었다. 왕후 연태연에 의해서. 그리고 그와 손잡은 흥수에 의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는데 관용을 베풀 마음이 생길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와서도 관용을 베풀면 그 인자함을 칭찬해야 하는 것이지 그 원한을 푼다고 비난할 것은 되지 못한다. 더구나 은고가 직접 보복으로 주인 이들도 몇 안 되지 않은가 말이다. 연태연도 살았고, 그녀의 아들 태도 살았고, 흥수도 살았다. 그녀를 요녀로 몰아가는 것은 사료가 그러하듯 성충과 흥수, 계백이 아니었을까? 그들 스스로 은고를 요녀로 몰아가며 실제 그녀를 요녀로 만들어 버린다. 단지 의자에게도 은고에게도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상대는 서로에 불과했던 것 뿐이다.

 

왕이든 왕비든 관리든 장군이든 죄다 자기 감정에만 충실하고. 정치적 수사란 없다. 나의 입장과 상대의 체면을 고려해 우아하게 말을 꾸미고 돌리는 수사란 없다. 왕의 뜻을 멋대로 헤아리고, 왕에게 자신의 원한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고. 귀족들은 비겁하다. 망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아예 왕에게 직설적으로 더 이상 형제라 생각하지 않는다 했을 때 쿠데타를 일으켜 왕위를 찬탈한 연개소문이 자꾸 오버랩되고 있었다. 왕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귀족은 저리 무서워하는데도. 왕이 우습다. 의자왕의 인품을 본다.

 

이제는 습관처럼 보게 된다. 어떤 기대같은 것은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지나 버렸다. 한지우의 퇴장은 드라마의 입장에서 매우 희소식일 것이다. 그녀의 어색한 연기는 항상 그나마 드라마에서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첫째 이유가 되어 왔었다. 그래도 사극이니 볼 만은 하다.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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