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니 계백(이서진 분)을 죽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대체가 전제왕조에서 왕의 명령이 떨어졌는데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실력행사에 나서는 것이 정상적인 상황인가? 그것도 단지 자신들의 상관을 구명하려는 의도에서다. 그들이 만일 왕에 대해 다른 마음을 품게 된다면?
당장 동시대의 당이 건국되는 과정부터가 그랬다. 원래 당고종 이연은 단지 현실에 만족하며 그것을 누리고 살 뿐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수왕실의 인척이기도 했던 이연의 명성이나 실력은 그를 가만히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수양제의 실정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바로 그의 아들 이세민과 가신들이 그로 하여금 수양제에 반기를 들도록 몰아세운 것이었다. 전혀 수왕조에 불만이나 다른 마음을 가진 적이 없음에도 그는 수왕조가 멸망하자 그를 대신하여 당을 세우고 초대황제에 등극하고 있었던 것이다. 명분이야 어쨌든 그것은 반역이었다.
그보다 조금 뒷시대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송태조 조광윤도 원래 후주의 절도사로 있다가 아직 어린 공제가 즉위하자 후주의 여러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경우였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나 나무는 바람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가지가 뻗고 잎이 무성할수록 나무는 더욱 바람에 흔들리게 된다. 고작 후방의 고을을 맡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어 그리 행동에 나서고 있다면, 그보다 더 한 명령이 떨어지면 그때는 어쩌려는가? 설사 계백에게 죄가 없더라도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는 계백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없고, 더구나 세력조차 없다. 누구도 그의 손발이 되어 그를 대신해 계백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 계백의 죽음에 대한 모든 책임은 왕인 의자(조재현 분)가 져야한다. 일개 달솔에 불과한 무장 하나조차 왕의 권위로 찍어누르지 못한다.
어찌 보면 의자왕의 이해할 수 없는 강력한 왕권이란 프랑스 절대왕정기의 루이 14세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실제 루이 14세가 휘두르고 있던 절대적인 권력이란 그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의 영지를 벗어나 프랑스라고 하는 더 큰 이익을 다투고자 했던 귀족들과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다시 말해 귀족들의 필요가 루이 14세라고 하는 절대권력을 만들었고, 정작 그것을 조정하던 것은 루이 14세에게 제압되었다고 여겨졌던 귀족들 자신이라는 것이다.
의자왕이 아무리 정사암회의까지 폐지하고 멋대로 독재를 한다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겻은 역시 기존의 귀족들의 지지였을 것이다. 귀족들에게도 백제는 필요하다. 백제의 구심점으로서 왕이 필요하다. 무왕과 겨루던 사택씨 역시 그래서 왕으로서의 권위에 대해서는 누르려 하면서도 왕으로서의 존재에 대해서만큼은 침범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왕을 끼고서 다른 귀족을 호령하려 했지 그 자신이 왕을 대신하려 들지는 않았었다. 고대국가에서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의자왕의 왕권이 강한 것이 아니다. 의자왕이 따로 무슨 대단한 실질적인 힘이 있어 귀족들을 누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용인해 주는 것이다. 의자왕의 존재를. 의자왕이 하는 것을 지켜보는 가운데 의자왕이라는 존재를 통해 백제 전역에 사비의 중앙귀족들은 자신의 권위롤 세우게 된다. 이익을 탐하고 영향력을 미친다. 아마 드라마에만 나오지 않을 뿐 그 뒤로는 강력한 왕권을 등에 업고 지방에서 권세를 부리는 중앙귀족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의자왕 역시 굳이 주위의 보는 눈을 무릎써가며 계백을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계백을 직접 자기 손으로 죽임으로써 괜한 꼬투리를 잡혀서는 안 된다.
너무 넘겨 생각하는 것일까? 과연 작가가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까지 생각을 하고 대본을 썼겠는가? 솔직히 많이 회의적이다. 그에 대한 어떠한 사소한 단서조차도 없었다. 어떻게 의자왕은 저토록 강력한 왕권을 휘두르고, 어째서 귀족들은 단지 사택씨가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의자왕을 보고만 있는가? 그러나 어찌되었거나 그러한 강력하지만 불안한 왕권이 의자로 하여금 죽이고자 했던 계백을 살라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음은 분명한 것이다. 그의 무리가 왕명에 항거하여 무력시위를 벌였는데 반역에 해당하는 행위를 왕이 처벌하지 못한다. 결국은 의자왕의 강력한 왕권이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정사암 회의가 사라지면 비단 왕권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굳이 다른 귀족들과 협상할 필요가 없는 유력귀족의 권한도 강해진다.
아무튼 결국 그래서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항상 드는 생각이, 어째서 백제는 망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러고 보면 역습에 들어갈 때다. 계백이 떠나고 12년, 비로소 태자가 부여효로 바뀌는 때라면 대략 의자왕 즉위 15년째가 된다. 이때에 비로소 의자왕은 왕자들로 하여금 좌평의 자리에 앉히며 본격적으로 왕권강화에 들어간다. 아마도 기존의 귀족세력이었을 성충과 흥수가 숙청당하는 것도 이 무렵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귀족들은 이반하여 백제가 멸망하는 이유가 되었고.
문제는 원래 의자왕 15년에 의자왕이 공격적으로 왕권강화를 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의 성 30여 개를 빼앗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면서부터였다는 것이다. 그 전에도 당이 고구려를 공격하는 틈을 노려 고구려의 배후를 공격하려던 신라의 빈틈을 공격 신라의 서쪽방면의 성 7개를 빼앗고 있었다. 계백이 다시 나타나기까지 백제가 마냥 신라에게 수세를 취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기까지 백제와 신라의 관계에서 항상 군사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것은 백제였고 그 중심에는 의자왕이 있었다. 한심하게 귀족들의 묵인에 의해 왕권을 과시하듯 휘두르던 드라마속의 의자왕과는 달리 실제의 의자왕은 군사적인 성공을 바탕으로 권위를 세우고 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현실적인 군주였다는 것이다.
그같은 의자왕의 군사적 감각이나 정치적 재능에 대해서는 깡그리 무시한 채 오로지 계백만. 그러나 역시 그 또한 계백을 죽이고자 했으니 죽이지 못한 이유와 같지 않겠는가? 왕으로서 왕권에 도전하려는 계백과 그 무리들을 제거하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것은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사정 때문이었다. 의자왕이 계백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것도 실제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딱 거기까지만 귀족들이 용납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귀족의 반대를 무릎쓰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성왕은 신라군에 사로잡혀 죽었다. 드라마속의 상황에 굳이 해석이라는 것을 하자면 그렇다.
결국에 은고(송지효 분)가 백제가 망하게 되는 원흉이 된다. 시작은 선의다. 단지 자기가 모시는 은고가 황후로 인정받고 그 아들이 태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무언가 꾸며 보려 한다. 그런데 그것이 신라의 김유신에게 거꾸로 이용당하며 계백을 죽이려는 음모로 뒤바뀌고 만다. 그리고 계백이 다시 신라와의 최전선에 나섬으로써 그것은 백제의 기밀을 팔아버리는 이적행위가 된다. 자연스럽게 첩자가 아닌데 임자는 첩자가 되어 버리고, 은고 역시 그 책임을 나누어지지 않으며 안 된다. 그래서 은고는 기록에서처럼 요녀가 되는 것일까?
아무튼 이래서 항상 왕들은 군벌을 경계해 왔던 것일 터다. 힘이 없으면 그대로 왕이 시키는대로 따르고 말 것을, 힘이 있으니 왕명에도 거스르게 된다. 왕명을 거스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왕을 상대로 행동에 나서게 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그것이 왕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행동으로 번진다면 과연 어찌될 것인가? 선조가 끝까지 이순신을 경계했던 이유였다. 당장 조선을 세운 이성계부터가 그 가진 힘이 고려의 힘을 뛰어넘나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군벌이었다.
정상적인 나라라면 계백은 죽었다. 아니 죽기 전에 그와 같이 군사들이 사사로이 단지 장수를 위해 왕권에 도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계백은 죽었어야 했다. 그러나 죽지 못했다.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답답하고, 죽이지 못하는 처지가 애처롭다.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이 드라마에서 어떤 역사적 맥락이나 사실을 구한다는 것은 매우 무모한 일이다. 이런 정도가 적당하다. 계백이라고 하는 초인적인 영웅이 있고, 한 때 의심을 받고 곤란에 처했다가 다시 구세주처럼 백제를 위해 나선다. 약간의 치정극과. 그런 정도면 좋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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