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생각하다. 도대체 박지형(김래원 분)의 앞날에 어떤 힘든 일들이 기다리고 있길래 지금 이토록 크게 죄를 짓도록 하는 것일까?
명색이 주인공이다. 주인공이란 시청자와 마주하는 드라마의 얼굴이다. 시청자와 직접 마주하며 시청자로 하여금 드라마에 이입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드라마란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인공의 말과 행동을 따라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자면 시청자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캐릭터는 필수적이다. 최소한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가? 도대체 몇 사람을 곤란에 처하게 만드는 것인가? 곤란하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다. 노향기(정유미 분)에게 그것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며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하나의 비극이다. 그토록 울고, 그토록 토하고, 그토록 아파하고, 그토록 힘들어 하면서, 그러면서도 여전히 박지형을 걱정하며, 혹시라도 자신의 사랑이 박지형에게 마음의 짐이 되지 않았나 미안해 한다. 그녀의 순수와 선량함이 박지형에 대한 어떤 연민도 동정도 거부하게 만든다.
노향기 뿐일까? 노향기가 어떻게 그토록 해맑게 순수하게 자라날 수 있었는가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말이야 험하게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 오현아(이미숙 분)는 경우를 아는 사람이다. 딸을 위해 직접 박지형을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었고, 결국 파혼을 하고 난 다음에도 그리 분통이 터져 하면서도 박지형에 대한 분노와 그 부모에 대한 증오를 구분할 줄 알았다. 박지형으로 인해 당한 일은 당한 일이고 기존의 인연은 인연대로 남겨두는 것이다. 그토록 있는대로 소리를 지르며 비난하더니만 정작 박지형의 어머니 강수정(김해숙 분)이 문병을 위해 찾아오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리부터 권한다.
노향기의 아버지 노홍길(박영규 분)은 어떠한가? 그 상황에조차 노홍길의 관심은 오로지 딸 노향기에 대한 것 뿐이었다. 자신의 체면따위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파혼을 하게 되면 자기의 입장이 어떻게 되는가 전혀 생각도 않고 있었다. 진정 딸이 원하는 것이 무언가? 딸을 위해 무엇이 최선일 것인가? 역시나 상황이 최악을 치달으며 결혼이 파토나고 직접 소식을 듣지 못하고 찾아온 하객들에게 사죄하는 입장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박지형의 아버지 박창주(임채무 분)는 그의 친구다. 강수정에 대해서도 괜한 화를 돌리거나 하는 일이 없다.
강수정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상황에조차 아들의 편을 들고 마는 천상 어머니이니. 남편인 박창주의 처지가 곤란해지고, 강수정 자신의 입장도 난처해지건만, 그러나 정작 박지형으로 하여금 파혼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든 원인인 이서연(수애 분)을 만나는 자리에서조차 얼굴 한 번 붉히지 않고 있었다. 조근조근히 냉정하게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화를 마치고 있었다. 참으로 근래 보기 드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처였다. 박지형이 노향기와 파혼한다고 해서 모두의 감정이 격앙되고 그에 따라 모든 비난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박창주가 아들 박지형을 쫓아낸 것을 두고 너무하다 말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겠다. 물론 박창주의 말이 과격한 것은 있었다. 대놓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박지형으로 인해 자신이 잃게 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서연에 대해서도 신분상승을 노리고 아들을 유혹한 몹쓸 여자로 비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박창주만을 탓할 수 있을까? 이서연을 욕보인 것은 박창주가 아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결국 그런 상황을 만든 것은 박지형의 성급하고 섣부른 판단이었다. 충분한 사려도 배려도 없는 행동이었다.
어쩌면 박지형이 지은 가장 큰 죄일 것이다. 노향기를 비련의 주인공으로 만든 죄도 물론 크다. 하지만 어차피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자체가 일상다반사일 것이다. 서로 조용조용히 합의 하에 납득하고 헤어지는 경우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경우 헤어지는 상황에서는 찬 사람과 차인 사람이 구분될 수밖에 없다. 단지 박지형은 그것을 결혼식 바로 전날이라는 최악의 상황에 실천에 옮겼을 뿐이었다. 그래서 노향기도 그것을 받아들인다. 단지 박지형이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그녀를 거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박지형을 사랑한다. 착한 여자다. 그녀는 분명 아버지 노홍길을 닮았다. 노홍길 역시 그러한 상황에서도 박지형을 직접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밖의 사람들이다. 오현아가 온갖 할 소리 못 할 소리를 섞어가며 박지형을 비난한다. 아버지 박창주는 아들 박지형을 아예 집에서 쫓아내고 있었다. 어쩌면 사위가 될 수도 있었던 친구의 아들을 온갖 소리로 비난해야 하는 처지라는 것도 사실 매우 우스운 것이다. 그래도 딸을 위해 변명도 하고 거짓말도 하다가 전화선을 잘라버리고 마는 그녀의 심정을 누가 감히 이해할 수 있을까? 더구나 박창주는 아예 아들을 집에서 내쫓기까지 했다. 아들 박지형이 저지른 행동으로 말미암아 차며 집이며 사무실투자금까지 다시 돌려받으며 빈털털이로 내쫓는 비정한 아버지가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누구의 책임일까?
이서연의 처지도 처지다. 정작 이서연을 위해 그리 했다지만 만일 그러한 사정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이서연의 입장은 어떻게 될까? 그렇지 않아도 노향기라는 약혼녀까지 있는 박지형과 결혼하려 할 경우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 부담스러워 그를 포기하겠노라 말하던 이서연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박지형으로 말미암아 박지형의 어머니를 만나야 했고, 박지형의 아버지로부터는 상당히 저열한 표현으로 비난까지 들어야 했었다. 오현아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노향기가 알게 된다면? 그녀는 그것을 바라지도 않았는데.
모두를 비극으로 몰아넣는 동시에, 다시 모두를 죄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당연히 비난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이서연은 그녀와 전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토록 말렸고 나중에는 사정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지 자기 입장에 충실했을 따름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에만 충실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에고는 그런 상황에조차 끝까지 아버지 박창주에게 이해를 구하며 변명하는 것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심지어 노향기에게는 이해해 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믿는다고까지 말한다. 철저한 자기연민이다. 지금은 아무도 그를 이해해주지 않지만 언젠가는 이해해주리라.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진정한 사랑을 위해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는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있다. 이서연 또한 언젠가는 자신의 진실한 사랑을 알고 받아들여주게 되리라. 그는 옳다. 당당하다. 주위가 얼마나 곤란해하고 고통스러워하든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혼란일 뿐이다.
도저히 이입이 되지 않는다. 끝끝내 병 앞에서 병을 인정하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 이서연의 히스테리는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그저 가엾은 누이를 걱정할 뿐인 동생 이문권(박유환 분)이건만 감당할 수 없는 비극에 그녀는 견디지 못하고 폭발하고 만다. 그럼에도 이문권 차마 이서연을 탓하려 하지 않는 것은 그녀의 비극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제멋대로인 그녀의 말이나 행동에 대해 공감하는 것도 역시 그녀의 비극에 제대로 공감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박지형은 어떠한가? 약혼녀인 노향기도, 그녀의 부모도, 자신의 부모도, 심지어 이서연마저 그로 인해 곤란한 처지에 놓여 버렸다. 그런데도 진심과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레서 문제인 것이다. 아마 그것이 드라마의 주제일 것이다. 알츠하이머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맞아 서서히 무너져가는 이서연의 비극과 그녀의 비극을 가장 가까이에서 감당해야 하는 박지형의 지고지순한 진실한 사랑. 그런데 초반부터 이렇게 삐걱거리고 있다. 여전히 자신이 입은 상처보다 박지형의 입장을 걱정해주는 노향기의 모습을 보며 도저히 박지형의 행동이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 인정하기가 힘들다. 노향기에 비하면 그의 사랑은 이기적이다. 이서연의 모습을 보더라도 그의 사랑은 일방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을 진실한 사랑으로 바꾸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 고생해야 한다. 더 고통스러워해야 한다. 저 좌절하고 절망하며 때로 주저앉고 무너지는 모습도 보여야 한다. 노향기가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이서연의 절규와 눈물 만큼이나 그 또한 아픔을 공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부터는 그의 비극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서연의 비극에 이끌린 희생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더욱.
과연 박지형의 행동은 진실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인가?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려 하는 진심어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는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드라마의 관건인 것이다. 아직까지는 이서연의 비극이 드라마를 끌고 가지만 김래원의 비극이 더해짐으로써 드라마는 비로소 '드라마'로서 완성되게 된다. 김수현이라는 이름이 그리 허술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래서 김래원이 앞으로 헤쳐가야 할 일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드라마의 성패는 바로 거기에 달려 있다. 현재 그다지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쳐지지 않는 박지형의 에고가 얼마나 지고지순한 이타의 사랑으로 설명되어지는가? 그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비극의 심연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야 할 것이다. 뻘을 뒤집어쓰고 짓눌리고 이겨져야 한다. 박지형의 비극이 극대화될 때 그의 진심도 인정받는다. 드라마의 내용도 살아난다. 물론 지금도 드라마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나쁜 사람이란 없다. 독한 사람도 없다. 독하고 나쁜 것은 오로지 남자주인공 박지형 뿐이다. 그가 모든 문제의 근원이다. 과제일 것이다. 어떻게 그를 남자주인공으로 만드는가? 억지스럽지 않게 지금 악역이 되어 있는 그를 다시금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남자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박지형 스스로 악역이 되며 그러면서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남자주인공이 되어가야 한다. 어렵다.
고풍스러운 대사가 좋다. 문예의 향기를 풀풀 풍기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그리 탐욕스럽게 들린다. 저렇게 멋드러지는 대사를 쓰던 무렵도 있었을 텐데. 약간은 낡았다는 느낌도 있지만 그조차 훌륭히 세련되게 살려내고 있으면 그런 느낌조차 없다. 어느새 몰입하며 본다. 역시 김수현이다.
재미있다. 뻔한 이야기이고, 식상한 구도인데,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리 맛깔나다. 인물들의 관계며 그 행동들도 상당히 디테일하며 의미가 있다. 좋은 드라마다. 예감한다. 대단하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851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뿌리깊은 나무 - 정기준이 집현전을 폐지하려 이유... (0) | 2011.11.10 |
---|---|
계백 - 흰여우 군대부인 요녀 은고 나타나다! (0) | 2011.11.09 |
포세이돈 - 흑사회의 최후, 멋있는 범죄자란 없다! (0) | 2011.11.09 |
계백 - 죽여야 하는 이유와 죽일 수 없는 사정... (0) | 2011.11.08 |
천일의 약속 - 박지형의 에고와 자기연민, 비극을 사랑하다! (0) | 2011.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