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케이조쿠 - 일본드라마의 안 좋은 점이 모두 들어가 있다!

까칠부 2011. 11. 17. 19:55

일본의 문화는 순간의 문화다. 바로 그 순간을 통해 영원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아마 일본에서 기독교가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일본의 불교도 그래서 다른 나라의 불교와 다르다.

 

그래서 폼을 잡는다. 장면 하나를 위해서. 대사 한 마디를 위해서. 김수현의 드라마를 오랜만에 보면서 느낀 위화감이었다. 마치 일본드라마 같다. 괜히 심각한 척 장황하게 늘어놓는 수사의 미학. 하지만 김수현의 대사는 드라마와 밀착해 있다. 일본 드라마는 다르다.

 

토다 에리카를 좋아하기에 케이조쿠2를 보기 위해 오래전 케이조쿠1을 먼저 보았다. 나카타니 미키는 역시 내 취향이 아니다. 전차남을 보면서도 어째서 나카타니 미키인가?

 

캐릭터는 흥미롭다. 역시나 천재 답게 어딘가 평소의 말이나 행동이 어눌하고 멍하다. 옷차림도 후줄근하고, 무언가 정리가 안 된 듯하고. 그러나 민완형사의 딸로 주목받고 있는 것과는 달리 어린 시절부터 죽은 아버지의 수사자료를 토대로 실제 사건을 해결해 온 주역이기도 했다. 놀라운 직관과 방대한 지시기 놀랍다.

 

그러나 과연 그 사건의 해결은 논리적이고 치밀한가? 일본에서 추리물이 강세를 이루는 이유이기도 하다. 많은 일본인에게 세계란 완결되어 있다. 그렇다고 믿고 싶어 한다. 완결된 닫힌 세계 안에서 의미있는 논리일 뿐이다. 케이조쿠도 그같은 문제를 만복한다. 더구나 마지막 주인공 시바타 준이 죽는 장면에서는 도대체 죽은 척 하고 있던 마야마는 어째서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는가?

 

그를 말릴 기회가 있었다. 범인을 말리고 시바타를 구할 기회가 마야마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노노무라 코타로가 경찰들을 이끌고 올 때까지 마야마는 반전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시바타 준이 총을 맞는 그 순간에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비극이 찾아왔다. 시바타 준의 죽음이라는 비극이. 시바타 준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마야마의 눈물이란 얼마나 공허한가?

 

많은 일본 드라마가 그렇다. 그 한 장면을 위해서. 거기서 시바타 준이 죽어야 한다. 마야마가 눈물을 흘려야 한다. 죽은 줄 알았던 마야마가 살아나며 반전이 일어나야 한다. 일본 드라마에서 흔한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도 반드시 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시바타 준은 어떻게든 죽고 만다. 시바타 준의 죽음을 통해 드라마는 완결되며 이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케이조쿠2에서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된다. 오히려 더 최악이다. 차마 2화를 볼 용기를 내지 못했다. 토다 에리카의 토오마 사야의 캐릭터는 흥미롭지만 실존감이 없다. 허공에 붕 뜬 채 공허한 대사와 행위만을 반복할 뿐이다. 순간이 영원으로 이어지고, 개인이 관계를 정의한다. 캐릭터에 대한 일본 특유의 집요함은 내러티브 자체를 흐트러 버린다. 폼은 멋있는데 내용이 없다.

 

물론 그러 것이 훌륭하게 장점으로 작용하는 드라마도 물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결국 힘빠지게 만들고 만다. 지금까지 <화려한 일족>은 그래서 내게 최악의 드라마로 남아 있다. 일본드라마는 딱 마지막회 전회까지만 재미있다고 말하는 이유다. 아니면 마지막회 마지막 10분 남겨놓고 그만두면 좋은 기억으로 끝날 수 있다. 일본식 미학이 항상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럼에도 우리나라 드라마에는 이같은 추리물이 없으니까. 한 번 써볼까? 한국에서 추리물이 인기없는 이유. 무엇보다 추리물과 스릴러, 하드보일드의 차이에 대해서.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하기는 마야마의 과거로 이어지면서부터 벌써 지겨워지려 하고 있었다. 또 반복이구나. 또 이런 식이로구나. 어려서부터 하필 일본 추리물을 많이 보았다. 와타베 아츠로는 참 멋진 배우다. 그것이 한계다. 아쉽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