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아니 초인이란 다름아닌 파천황적 존재일 것이다. 예수가 태어나기 이전과 이후로 세계의 역사가 나뉘듯, 동아시아의 역사 또한 공자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르다. 나폴레옹이 있었기에 프랑스의 혁명은 지켜지고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유럽의 근대가 그로부터 열렸다.
기존의 질서를 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운다. 기존의 가치와 상식을 깨뜨리고 그 위에 새로운 가치와 상식을 바로 세운다. 초인은 그래서 혁명을 일으키는 존재다. 초인이라고 하는 존재 자체가 혁명이다. 초인이란 개인이지만 또한 시대이며 역사다. 그로 인해 역사가 바뀌고 시대가 정의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초인의 존재는 항상 옳기만 한가?
세종 또한 초인이었다. 다른 것 필요 없다. 그가 직접 만든 '한글'이라고 하는 발명품 하나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초인의 반열에 들 수 있다. 비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전할 수 있게 되었다. 기록이 남아 있는 한 영원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국의 한자가 아닌 우리 자신의 언어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네트워크란 인간이 문명을 일으킨 원동력인 동시에 인간이 문명을 통해 획득한 문명 그 자체일 것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한글로 인해 쉽게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며 자신이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서로에게 간단히 전할 수 있다. 그다지 크게 의미가 없는 하찮은 잡담에서부터 학술논문이나 세계의 중요한 뉴스들이 한글을 통해 순식간에 다른 사람들에게로 전해진다. 전해지는 동시에 재생산된다. 하루에만도 헤아릴 수 없이 쏟아지는 인터넷의 텍스트는 바로 그러한 한글의 위력일 것이다. 과연 한국인에게 한글이 없었을 때, 중국의 한자를 여전히 쓰고 있어도 그와 같은 왕성한 텍스트의 생산과 공유가 가능했겠는가? 한국의 지금과 같은 성장과 발전이 가능했었겠는가?
당시에도 여성을 비롯한 교육의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한글로 인해 비로소 읽고 쓰고 자신의 생각을 전할 수 있었다. 그다지 많은 배움을 갖추지 않고서도 쉽게 소식을 전하고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눈도 귀도 입도 없이 어둠속을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빛과 기적을 내려준 것과 같았다. 과연 세종이 아니었더라면?
하지만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 역시 매우 정력적이며 유능한 황제였다는 것이다. 성조 영락제를 이은 인종 홍희제와 선종 선덕제 역시 이른바 '인선의 치'라 불리우는 명왕조 전기의 전성기를 열었던 탁월한 군주들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정력적이고 유능한 황제들이 그들을 위해 만든 강력한 왕권은 그러나 무능하고 게으른 이후의 황제들에 의해 환관이 발호하여 조정이 부패하고 타락하는 원인이 되고 있었다. 선덕제의 뛰어남을 국정에 반영하는 효율성만큼이나 정통제나 만력제의 무능함마저도 지나칠 정도로 효율적으로 명의 국정에 반영하고 말았던 것이었다.
세종은 분명 초인이지만 그러나 과연 세종의 뒤를 이은 국왕마저 세종과 같은 초인일 것인가? 그와 같이 인성과 능력을 모두 갖춘 뛰어난 군주일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만일 세종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왕이 세종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측근들과 더불어 밀실에서 일을 꾸미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관료들도 사관들도 사대부도 아무도 모르게 단지 좋은 의도에 의해 정책이 만들어지고 집행된다. 그래도 결과가 좋으면야 다행이겠지만 그래서 그 결과가 전혀 좋지 못하다면 그래도 세종의 방식이 옳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당연한 것이다. 지금 당장 정부에서 국무회의나 국회조차 알지 못하게 나라의 장래를 위해 원대한 계획을 꾸민다. 물론 그것이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장기적으로도 크게 이익이 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정해진 절차를 무시한 채 아무런 검증도 받지 않고 추진된 그러한 계획들을 단지 결과가 좋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순순히 받아들이고 말 것인가? 결과가 좋으니 과정이야 아무래도 좋다. 그것을 독재라 부른다.
그래서 입법부가 있고, 행정부가 있고, 사법부가 있다. 언론이 따로 있다. 시민단체라는 것도 있다. 현대의 민주화된 정부는 예외없이 권력을 나누고 그 나누어진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더 효율적이어서가 아니다. 어쩌면 더 비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배제되고 소외되는 더 많은 아이디어와 가능성과 주체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소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려는지, 그 결과는 어떠할 것인지 보고 듣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다. 비판을 통해 바로잡을 수 있고, 그 결과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과연 다수라 해서 항상 개인보다 옳은가? 그래서 세종과 같은 초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초인이 초인인 이유는 그 다수가 이제까지 믿고 여기고 있는 것들을 부수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옳다는 것은 다수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자기와 관련한 일들이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전혀 타인에 의해 일방적으로 판단되고 결정되어지는 것은 피할 수 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어째서 자신이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받아들이기도 쉽다. 결적으로 효율이 높아진다. 무엇보다 그가 초인인가 아닌가는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결론지어진다. 그때까지는 그 결과를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한 충돌인 것이다. 과연 새로운 글을 만들어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이미 기존의 글이 있다. 한자가 있어 그것으로 읽고 쓰기에 크게 불편한 것이 없다. 어차피 일반백성들은 그다지 글을 배울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글을 배울 수 있는 사대부는 기존의 한자로도 그다지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고 쓸 수 이다.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과연 굳이 새로운 글을 만들어 번거로움을 더할 필요가 있을까? 더구나 한자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동아시아의 유일한 문명인 중국문명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중국문명의 모든 문명적 성과가 한자에 담겨 있다. 한자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러한 중국의 문명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지금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다. 영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영어를 사용하는 해외의 지식과 정보를 보다 수월하게 받아들이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영어를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은 그러한 선진의 지식과 정보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중국의 문명은 한자로 기록되어 전해지는데, 그것을 한자가 아닌 다른 문자로서 과연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한국어로 번역된 롱펠로우는 결코 롱펠로우가 아니다.
지식인다운 고민이다. 정기준(윤제문 분)이 세종(한석규 분)이 새로운 글자를 만들려 함을 알아내었을 때 오히려 세종을 비웃은 이유일 것이다. 필요가 없다. 쓸모가 없다. 정히 글을 읽고 쓰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면 보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문자인 한자를 빌어 쓰면 된다. 그동안도 그래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혼란만 키우고 세종 자신을 국제적으로나 조정과 유림들로부터나 고립되는 상황을 자초할 수 있다. 아무리 정기준이라도 세종이 그토록 대단한 글자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예상하는 것은 무리인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세계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어쩌면 세종조차 미처 전혀 생각지 못한 우연이었고 기적이었다. 말했듯 그래서 세종은 초인이다.
그래서 움직이고 마는 것이다. 왕을 견제하는 장치를. 왕을 감시하고 견제하여 그로 인해 나라가 잘못 엇나가지 않도록 정도전이 준비한 장치들을.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여 후대에 역사로 남기게 될 사관들과 관리들의 잘못을 감시하고 적발할 책임이 있는 사헌부,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을 건국한 주체로써 항상 왕과 조정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바로잡을 책임이 있는 유림이다. 왕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판단과 결정에 대해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다만 문제라면 그것이 초인 세종에 의해 이루어진 초월적인 업적이라는 것일 게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한글의 창제를 반대한 것은 반동이었지만, 당시의 사람들의 상식에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이 무려 60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지만 측근들과 밀실에서 꾸민 일들이 잘못된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비한다.
초인이란 상식으로 계량할 수 없는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초인이다. 초인을 이해하기까지도 상식적인 보통 사람들은 상당히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 시간을 단지 초인이라 믿고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이제까지의 상식을 위협하는 행위에 대해 마땅히 비판하고 견제하여 혹시나 모를 일들에 대해 대비할 것인가? 태종으로부터 세종이 하는 일을 반대하지 말라는 유명을 들은 조말생(이재용 분)조차 갈등하게 만드는 그것을 왕이 하는 일이니 그냥 지켜만 보고 있으라는 것은 단지 왕의 의지만을 쫓는 피동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선택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반대하고자 나선 정기준과 사대부들의 판단과 행동은 옳았고,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했던 세종의 판단도 옳았다. 세종의 한글창제가 파천황의 혁명인 이유다.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체계 안에서 모두의 동의를 얻어가며 절차를 밟아 이루어진 변화가 아니다. 그야말로 한 순간 모든 것을 깨부수며 나타난 혁명이었다. 세종이라는 한 개인에 의해. 초월적인 한 개인의 의지에 의해. 그리고 그러한 혁명을 당장 이해할 수 없었던 상식적인 인간들이 그것에 반대하며 저항한다. 오히려 세종보다 정기준의 판단에 동의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세종은 둘이기 힘들지만 정기준은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다. 세종과 같은 이가 역사상 다시 나오기는 힘들지만 정기준과 같은 인물은 얼마든지 더 나올 수 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 그럼에도 물론 한글은 필자가 가장 사랑하는 우리 역사의 걸작품 가운데 하나다.
아무튼 드라마가 시작된 이래 마침내 처음으로 강채윤(장혁 분)이 세종을 압도했다. 막연히 글을 배우면 백성들에게도 힘이 생기게 될 것이라는 세종에 대해 강채윤은 자신의 아버지의 유서를 들어 그것이 얼머나 공허한 탁상공론인가를 이야기한다. 백성은 맞아서도 죽고 때려서도 죽는다. 백성은 글을 몰라서도 죽고 알아서도 죽는다. 글을 배워 주인을 잘 모시며 행복하게 살아라. 글을 배우는 것은 주인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을 더 잘 모시기 위해서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글을 아는 노비는 다루기가 쉽다. 굳이 불러 말로써 전하지 않아도 글로써 노비에게 시간과 거리를 뛰어넘어 자신의 지시를 전할 수 있다. 가르치기도 편하다. 노비로써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그것이 어째서 그러한지. 분수를 안다고 한다. 주제를 안다고 한다. 모두가 배워서 아는 것들이다. 분수도 주제도 모두가 가르치고 배워서 알게 되는 것들이다. 훈민정음으로 인해 백성들이 글을 알게 되면 똘복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어째서 임금과 사대부에 복종하고 따를 것인가부터 배우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는 아무 이유도 없이 죽었지만 이제는 이유를 가르쳐주고 더욱 당당당하게 백성을 죽이게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이 강채윤은 그 글을 배워 쓰게 될 입장이니까. 글을 몰라 그 억울한 일을 당했고, 글을 알고 난 뒤에도 세상의 모순과 부조리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백성은 여전히 백성이고, 양반은 여전히 양반이며 왕은 여전히 양반이다. 백성이 백성이고 양반이 양반인 이상, 노비가 노비인 이상 글을 배운다는 것이 그들의 현실을 당장 바꾸어주지는 않는다. 그러한 구조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그것은 단지 구중궁궐에 아무 근심걱정없이 사는 왕의 한낱 쓸데없는 유희에 불과하다. 아버지가 그러한 유언을 남겼으니 왕과 싸우는 자체가 무의미한데, 왕이 만든다는 새로운 글따위 강채윤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강채윤이 어리석지만 - 아니 지금의 눈으로 보더라도 과연 한글의 백성들의 삶을 보다 나아지게 했는가? 백성들로 하여금 왕과 사대부로부터 자유롭도록 만들어주었는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조선이 거의 망할 무렵이 되어서야 서학이 나타나고 동학이 나타나며 일반 백성들이 스스로 권리를 자각하는 계기가 되어 주기는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전에 이미 백성들은 스스로가 왕의 신하이며 사대부가 자신들의 윗전임을 인정하고 납득하고 있었다. 지극이 현실적이며 당연한 태도다. 정기준과 이유는 다르지만 그래서 강채윤 억시 새로운 글자를 만들겠다는 세종과 다른 쪽에 서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만 한 가지라도 좋아진다면. '개파이'의 원래 이름인 '카르페이'를 원래 발음대로 써주고 싶은 아이의 작은 바람처럼. 소이가 바란다. 그로써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좋은 것이다. 제 2의 판관 강채윤의 판단은 어떠할 것인가? 개인적인 욕심으로 강채윤이 세종이 창제한 새로운 글자가 너무 대단하여 감격스러워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면 한다. 강채윤의 역할은 지금 이대로도 좋다.
왕이란 것이다. 왕이 한 일을 두고 일개 노비가 '지랄'이라 말했다. 그것은 왕인 세종의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왕이 하는 일인데 고작 '지랄'이란 말인가? 왕이란 탐욕스런 존재다. 누구보다도 탐욕스러워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다. 똘복의 '지랄'이라는 한 마디조차,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똘복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 그를 자신의 신하로 삼으려 한다. 싸움을 포기한 채 떠나가는 똘복은 세종을 전혀 보지 않으려는 타인에 불과하다. 세종이 절박하게 강채윤의 등뒤에 외치는 이유다.
"전하의 길이 있고, 이놈의 길이 있다면, 무사 무휼의 길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무휼(조진웅 분)도 왕이다. 자기 길을 가지고 자기 길을 간다. 그 길 위에는 왕조차 소용없다. 왕을 지키는 것, 그것이야 말로 무사 무휼의 가치이며 그가 존재하는 이유다. 정기준도 마찬가지다. 사대부도 마찬가지다. 옳은 것이 았다면 마땅히 그것을 행한다. 틀릴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옳은 것을 옳다 하지 못하고 옳지 못한 것을 옳지 못하다 하지 못하여 후회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후회를 남기지 않는 삶. 그것이 왕의 삶이다. 왕이 되는 길이다.
"당나귀 이빨 빠지는 소리 말고! 그런 것 하나도 안 중요해. 중요한 건 내가 누구냐 하는 거지. 내가 한지골 똘복이거든?"
강채윤이 왕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똘복을 버렸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똘복을 버리고 강채윤으로 아무일 없이 그냥 살아가려 했다. 그러나 끝내 그는 똘복을 버리지 못한다. 담이는 소이가 되었지만 강채윤은 다시 똘복이 되어 담이를 구하고 거슬리는 것들을 치우려 한다. 왕을 죽이려 하던 것처럼. 비로소 강채윤이 주인공다운 존재감을 보이는 순간이다. 다시 왕으로써 그는 판관이 되어 세종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상당히 중요한 대사들이 많다. 곱씹을수록 그 의미가 깊은 대사들이다. 왕에 대해서. 국가에 대해서. 백성에 대해서. 시스템에 대해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은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지 정치인 한 사람 바꾸면 그것으로 끝인가? 대단한 인물을 대통령으로 바꾸어 뽑으면 그것으로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는가? 그래서 믿고 맡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를 감시하고 견제하며 여러 사람의 의지를 모아 보아 느리지만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결론짓도록 장치를 마련하는 쪽이 좋은가? 아니면 그의 인품과 능력을 믿고 최대한 그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인가? 그 한 사람이 세종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연산군일 수도 있고, 중국의 만력제일 수도 있다. 한글일 수도 있지만 오호작통법일 수도 있다. 하기는 그러한 모든 사고가 민주화된 지금 경험하고 고민한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더욱 유효하다.
특별하다. 그저 흔하디 흔한 도식적인 성군으로서가 아니라 실재한 왕으로써 세종을 묘사한다. 세종은 물론 뛰어난 군주이지만 결코 그에 멈추지 않는다. 강채윤과 마주한 자리에서 세종은 강채윤의 열변에 고개를 돌리고 만다. 그 또한 인간이다. 왕이다. 생각이 깊어지는 까닭이다. 통쾌하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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