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알고 보니 모든 것이 다중인격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저질러진 것이었다. 워낙 지금까지 많은 다양한 작품에서 여러 형태로 쓰여온 소재이기에 이제 와서는 그다지 신선한 느낌이 덜하다. 오히려 흥미롭다면 제작진의 연출과 그리고 역시나 주제였다.
말 그대로 트릭이었다. 노골적인 속임수였다. 피해자 김지영의 조카 윤세화(정다혜 분)의 증언을 재연하는 과정에서 제작진은 윤세화의 증언에 나타난 K와 김여사에 대해 전혀 다른 배우를 내세우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윤세화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러나 이후 윤세화의 내면에서 다른 인격이 전면에 나서는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제작진은 역시 K와 김여사를 교차하여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윤세화의 다른 인격임을 강조해 보여주고 있었다. 충분히 연출기법상 허용되는 범위 안에서 시청자의 오판을 유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K와 김여사는 실재하는 인물들이며 이들에 의해 사건이 일어났다. 어쩌면 윤세화의 연인인 민정우(정의철 분) 역시 이들과 한패일 가능성이 높다. 그들을 찾아야 사건은 해결된다.
오히려 검사 민태연(연정훈 분)의 뱀파이어로서의 권능인 사이코메트리는 정확한 사실을 밝혀내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필 사이코메트리를 하면서 김지영의 시체 앞에서 진심어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윤세화를 보아 버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사이코메트리따위 없이 오로지 정황과 증거만으로 판단해야 하는 유정인(이영아 분)의 경우는 훨씬 사실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하기는 뱀파이어의 권능으로 모든 사실을 밝혀낸다면 그것은 초능물이나 괴기물이 되어 버리고 만다. 추리물이란 인간의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인 추론을 통해 미지의 사실을 재구성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 <뱀파이어 검사>는 뱀파이어라고 하는 독특한 소재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장르적으로 추리물을 지향하고 있다.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민태연과 유정인, 황순범(이원종 분), 최동만(김주영 분), 소박사(김예진 분)로 이루어진 수사팀의 합리적인 수사를 통해서이지 백파이어의 초능에 의지해서는 아닌 것이다. 단지 민태연의 뱀파로서의 권능이란 사건에 한 단서를 제공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니면 이번처럼 사건을 한 번 꼼으로써 그 이면의 진실을 밝히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주제. 하필 민정우라는 남자친구의 존재로 인해 벌써 오래전에 있었던 한 사건을 떠올리고 말았다. 어린시절 의붓아버지로부터 성적학대를 받아왔던 여자친구가 성인이 되어서도 그 기억으로 인해 괴로워하자 그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도와 여자친구를 학대했던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오히려 사람을 죽인 살인범이었음에도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학대에 대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며 동정여론이 크게 일었던 것을 기억한다.
민정우는 말한다.
"세화 말이에요, 얼마나 곁에서 지켜줄 사람이 없었으면 자기 스스로 인격을 만들었을까요?"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최근의 어느 사건에서도 오히려 피해자의 어머니는 피해자인 딸이 가해자인 남편을 유혹했다며 진정서를 내고 있기도 했었다. 그 전에도 미성년자인 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중인 남편에 대해 생계를 이유로 선처해 줄 것을 부탁하던 안타까운 어머니도 있었다. 또 그 전에는 부모를 대신해 맡아 기르던 아이를 돌아가며 성폭행한 친척들에 대해 피해자인 아이를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이유로 풀어주고 다시 아이를 맡아 기르도록 판결한 예도 있었을 정도였다.
너만 참으면. 너만 참고 견디면.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경제적으로 약자다. 전통적인 가부장적 질서는 남성이 당연히 가족을 부양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남편이 없다는 이유로 가해자는 사회적 편견이나 차별도 상당하다. 어찌되었거나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안심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다른 특별한 능력을 갖지 않는 한 남성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심지어 어머니조차 피해자인 여성의 편이 아니다. 그저 모두를 위해 참고 견디라 모진 한 마디를 안타깝게 해주는 수밖에 없다.
더구나 그러한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비롯된 순결이데올로기는 피해자를 오히려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피해자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그것이 그의 인생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될 것인가는 전혀 관심조차 없다. 어떤 식으로 피해자는 정조를 잃었는가? 어떻게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그러한 일을 당했는가? 무책임한 관음증은 피해자에게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남기곤 한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20년 전 사건을 끄집어내서 그때부터 윤세화 머리가 어떻게 된 거다, 얘는 정신병자다! 그렇게 사건을 후벼파내서 무죄가 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차라리 이렇게 된 바에야 죽는 게..."
어째서 성폭행 피해자들은 신고하기를 꺼리는가? 설사 신고하더라도 결국에 합의를 하거나 중간에 고소를 취하하고 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판까지 가더라도 유죄로 판결나는 경우가 드물거니와 그러한 사실이 밝혀질 경우 피해자는 사회적으로 거의 매장당하다시피 하게 된다. 어디가나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성범죄의 피해자라는 사실보다 성범죄로 인해 정조를 잃었다는 사실만이 남게 된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관음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거의 사회로부터 다시 한 번 성폭행을 당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같은 사회적 편견이 오히려 피해자에게는 더 큰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말처럼 차라리 죽는 쪽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가족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가장이기 때문에. 중요한 친척이기 때문에. 한 사람만 참으면 되기 때문에. 여기에 더해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자체가 부끄럽다. 도대체 처신을 어떻게 했기에 그런 상황이 벌어졌느냐? 네게도 잘못이 있다. 너라는 존재가 창피하다. 역시 성범죄 피해자 가운데 신고를 하려 해도 그것을 저지당하고, 신고를 하고 나서도 취하하는 많은 경우가 주위의 만류 때문이다. 부끄러운 것이다. 마치 피해자가 죄인인 것처럼.
도움을 청하려 해도 청할 수 있는 곳이 없다. 도움을 청하려 손을 내밀어 보아도 도대체 누구에게 손을 내민다 말인가? 그 자체로도 부끄럽고 창피한데. 그리고 그리도 고통스러운데.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에 알린다면 더 부끄럽고 더 창피하며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누구의 책임일까? 이제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당한 일에 대해 시시콜콜 그 과정에 대해 기사로 쓰고 방송으로 내보내는 미디어의 탓은 아닐가? 굳이 그런 일들을 알려 하고 또한 서로 화제로 삼는 대중의 탓은 아닐까? 그렇게 피해자는 철저히 사회로부터 고립당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다른 인격이라도 만들어 도움을 청하고 싶은 상황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러한 윤세화의 자신을 지키고자 만든 다른 인격에 대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 끄집어내려는 김지영은 그런 점에서 우리 자신과 닮아 있지 않은가 말이다. 미디어는 대중의 관음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그 사실들을 헤집고, 대중은 그것을 어설픈 정의감으로 치장한 채 한 편으로 화를 내며 한 편으로 그 피해자를 경멸하며 소비하려 든다. 겨우 민정우를 만나면서 사라지는가 싶었던 윤세화의 다른 인격을 끄집어내고 마침내 김지영을 죽이게끔 만든 것은 그러한 인간의 탐욕이었던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죄의 댓가다.
나는 과연 그러한 적이 없는가? 분노한다면 과연 굳이 그 사실에 대해 자세히 알 필요가 있는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 피해자가 누구이고 어디에 사는지, 애써 그래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한다. 잊어주는 것이 때로 피해자를 위한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처벌은 법이 한다. 법이 제대로 처벌한다면, 아니 설서 법이 제대로 진실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더라도 누군가 떠들어대는 것이 당사자를 위한 것은 아닌 것이다. 관심이란 그러한 것들에 대한 것이 아닌 어떻게 하면 성범죄 자체를 예방하고, 성범죄가 벌어지더라도 피해자의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것이어야 할 것이다. 개인이 아니다. 구조다.
하기는 워낙에 그동안 많은 추리물이 쓰여지고 제작되었다. 더 이상 새로운 이야기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진부하기까지 한 다중인격, 그러나 그것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가? 다중인격을 묘사하는 방식도 훌륭했고, 그를 통해 담아내려는 주제의식도 탁월했다. 증거와 자백, 스스로 그래도 마지막에는 윤세화를 지키려는 민정우의 모습에서 어떤 간절함을 느낀다. 진실한 사랑이라기에도 너무나 깊고 아름다운. 그러니 민저으로 인해 윤세화는 만들어진 인격을 잠재우고, 잠들어 있던 자기 인격을 일깨울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놀랐다. 유정인의 정체가 그것이었다니. 민태연의 정체가 뱀파이어라는 것 만큼이나 상당히 충격적인 설정이다. 아니 이 또한 새롭지는 않은가? 그렇더라도 설마 유정인이 유력 폭력조직 보스의 딸이라니. 윤세화를 구출하기 위해 조직원을 동원하여 바로 10분만에 찾아내는 능력은 민태연의 초능력보다 유용해 보인다. 설마 소박사와 최동만의 뒤에도 무언가 있을까? 드라마의 스케일이 갑자기 너무 커지는 느낌이다.
그래고 또 하나 느끼는 것, 유정인 역할의 이영아가 무척 매력적이다. 하얀 얼굴에 통통한 볼이 귀엽다. 바가지머리에 눈만 동그란 것이 마치 만화캐릭터를 보는 듯하다. 표정도 풍부하여 변화무쌍한 유정인의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낸다. 드라마의 즐거움이다. 재미있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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