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 백성은 글을 몰라서도 죽지만 글을 알아서도 죽는다!

까칠부 2011. 11. 19. 19:10

"해가 뜨면 나가 밭을 갈고/해가 지면 돌아와 쉰다/우물을 파 물을 마시고/밭을 갈아 그것을 먹으니/임금이 하는 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중국인들이 가장 이상적인 정치가 이루어지던 시대로 꼽는 신화시대의 요임금의 치세에 어느 농부가 지어 불렀다고 하는 격양가의 귀절이다. 한 마디로 내가 땀흘려 일해서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 밥을 먹는데 임금이 도대체 하는 일이 무엇인가?

 

노장의 근본이었다. 유가의 시작이기도 했다. 맑스 또한 이에 동의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아직 계급이니 신분이니 하는 것이 나타나지 않고 국가니 권력이니 하는 것도 없던 시잘 인간은 무척 자유로웠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도 빼앗으려 하지 않는다. 굳이 법이 없이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굳이 바른 정치를 펴려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아무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다름아닌 무언가를 하려 하기 때문이다. 치수를 하려 하니 사람들을 부려야 하고, 그저 사람만 부릴 수는 없으니 세금을 더 거두어야 하고, 정작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 배불리 먹으라고 하는 치수인데 그로 인해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하고 그나마 지은 농사조차 세금으로 빼앗기게 된다. 외적을 막자고 만든 군대지만, 그러나 오히려 병역을 지느라 생업을 등지고,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세금을 내다 보면 누구를 위한 군대인가 의문이 생긴다.

 

그래서였다.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가장 이상적인 군주상은 무언가 의욕적으로 하려는 군주가 아니었다. 능력도 출중한데다 성실하기까지 해서 백성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 끊임없이 궁리하는 그런 군주가 아니었다. 한고조 유방이나 삼국지의 유비처럼 그저 덕을 갖추고 가만히 돌아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으면 되었다. 원래는 조조와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영웅이었던 유비가 한심할 정도로 사람만 좋은 무능한 인물로 바뀌고 만 이유였다.

 

가만히 하고자 하는대로 내버려둔다. 더하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무언가 해주려 하지도 말고, 대신 굳이 있는 것을 빼앗으려들지도 말고, 그저 자기가 열심히 살려 하는 그대로 지켜만 보아주는 것이다. 그것이 덕이다. 스스로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사람들의 모범이 된다. 인위로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모범을 보임으로써 대부와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 따른다.

 

아마 지금의 사고방식으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왕이라면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더 잘 살 수 있도록 궁리하고 고민해야 하는데 어찌 손 놓고 가만히만 있는가? 유능하고 성실하여 항상 궁리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데 어찌 그것을 지켜만 보고 있는가? 그러나 말했듯 한 가지를 해 주려 하면 그 한 가지 만큼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고, 백성이 생산한 것을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된다. 차라리 그러느니 가만히 있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다.

 

바로 아나키스트들이 지향하던 것이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 억압이란 어디로부터 유래되었는가? 바로 백성을 위해서였다. 인간 자신을 위해서였다. 자신을 위해 더 나은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담보하고, 그 희생을 담보하기 위해 그것을 강제할 힘을 만들고, 다시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해 개인을 착취한다. 그렇게 왕이 나오고 귀족이 나오고 제사장이 나왔다. 그들이 조직화되어 국가를 세웠다. 국가란 단지 개인을 착취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가만 두어도 문제없이 잘 살 수 있는 개인들이건만 그렇게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욕망과 추구가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해방이란 바로 그러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과연 세종(한석규 분)이 새로이 백성들이 배워 쓰라고 글을 만든다고 백성들의 삶이 더 좋아질 것이 무엇인가? 옥떨이(정종철 분)도 말한다. 어차피 해가 뜨면 나가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와 쉬면 된다고. 굳이 시계가 있어야 할 필요도 없고, 농사짓고 먹고 사는데 글이 있어야 할 필연도 없다. 오히려 새로운 글이 만들어짐으로써 그것을 배워야 하는 번거로움만 늘게 된다. 글을 배워 일고 쓸 줄 알게 되었으니 이제까지 몰라서 좋았던 일들에 대해서까지 알아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 강채윤(장혁분)이 말한 글을 알아서도 죽는다고 하는 이유다.

 

어째서 글을 배워야 하는가? 아니 글을 배워야 한다면 무엇이 백성들로 하여금 글을 배우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가? 이미 기존에 한자라고 하는 완성된 문자가 있었다. 충분한 시간과 교육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어렵기는 해도 한자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읽고 쓰고 문서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무엇이 그러지 못하도록 백성들을 막는가? 아니 그 전에 그러한 백성들이 무리해가며 글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소이(신세경 분)이 어려서 그런 참혹한 일을 겪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 글을 알지 못해서였는가? 아니면 심온을 죽이려 하는 태종의 의지와 힘이 그만큼 강했던 때문이었는가? 무엇이 백성을 억압하고 내몰고 있는가 말이다.

 

그래서 강채윤(장혁 분)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글자가 백성들을 양반으로 만들어줍니까?"

 

그것이야 말로 핵심이었다. 양반이란 권력이다.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이다. 뼈빠지게 일하고서도 농사지은 것을 세금이나 지대네 해서 빼앗기는 일이 없다. 역을 지느라 생업마저 등지고 동원되는 일도 없다. 억울하게 누군가 그들을 위해하려 드는 것으로부터도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다. 신화시대에나 지어 부르던 격양가를 다시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글을 안다면 글을 안다는 이유로 더욱 착취당하고 억압당하게 될 것이다.

 

강채윤의 아버지 석삼의 유언이 그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었다. 주인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주인으로부터 해방되어 독립적인 삶을 살고자 해서가 아니었다. 주인을 더 잘 모시기 위해서였다. 글을 모르면 그를 부리는 주인 역시 번거롭고 성가실 테니까. 당장 석삼 또한 글을 알지 못하고 생각이 미치지 못한 탓에 상당히 난감한 상황을 주인인 심온에게 안겨주고 말았다. 그런데 글을 아는 것과 백성에게 힘이 생긴다는 것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겠는가?

 

그것을 강채윤은 안다. 그는 백성이니까. 옥떨이도 알고 주모도 안다. 그들 역시 백성이었으니까. 그러나 세종은 모른다. 그래서 그는 글을 읽지 못하는 백성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낼 수 있었다. 어째서 글을 배우려 들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자신처럼 잠을 줄여가며 글을 배우려 노력하지 않는 것이냐? 그러나 그 전에 백성들은 살아야 한다. 농사를 지어야 하고 그 농사지은 것을 세금으로, 소작료로 다른 이들에 바쳐야 한다. 역시 강채윤은 알고 세종은 모르는 사실이다. 그것을 강채윤은 알지만 이미 백성이기 이전에 세종의 나인이 되어 버린 소이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강채윤은 그것을 '지랄'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허튼 짓이었으니까. 그의 말대로였다. 글이 백성을 배부르게 만들어주는가? 백성들에 힘을 주는가? 그것은 구조의 문제다. 글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나라가, 권력이, 지배층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글을 안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글을 알아 현실을 깨닫고 바꾸려 한다고 있지도 않은 힘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글을 알아 더 많은 것을 알고 배우고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 있게 되어도 백성들을 수탈하는 구조 자체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백성은 여전히 지옥에 있고, 글자란 단지 높은 곳에 있는 세종의 자기위안에 불과할 수 있는 것이다. 백성은 글이 아닌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실제 역사를 보더라도 오히려 글을 알아 현실을 일깨우게 되었다는 이유로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글을 배워 현실의 부조리를 깨달았다. 글을 익혀 책을 읽을 수 있음으로써 무엇이 문제인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글을 쓰고 책을 펴냈다.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 현실로 이루어지기까지 도대체 얼마의 희생을 더 치러야 했었는가? 수많은 양심수가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이유가 글을 몰라서가 아니었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메이데이의 항쟁에서 죽임을 당한 것이 글을 읽을 줄 몰라서가 아니었다. 아마 글을 읽을 줄 몰랐다면 괜히 여성의 참정권을 쟁취하려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그러나 여전히 세계 어딘가는 양심수가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다. 하나같이 글을 읽을 줄 알고 쓸 줄 아는 그 사회의 지식인들이다. 무엇이 그들을 죽이는가?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의 교육을 받은 이들은 기본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갖는다. 아마 대전말기 궁지로 몰리면서 가혹하게 수탈하려 들지 않았다면 조선인들은 자연스럽게 대일본제국의 2등신민으로 자격을 갖추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오기는 병사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그로 하여금 목숨을 내던지도록 하였고, 메이지유신 이후 계속된 근대 일본의 황국신민 교육은 일본의 국민들로 하여금 기꺼이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위해 자신을 내던지도록 만들었다. 과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하는데 그 목숨을 바쳐 싸우다 죽는 것은 누구인가? 전쟁을 부르짖으며 독려하는 지배층이 직접 전장에 나가 죽임을 당하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노동자이고 농민이고 학생이다. 죽어도 전혀 달라지는 것이 없는 이들.

 

차라리 배운 것이 없으면 좋았다. 전혀 아는 것이 없다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괜히 현실을 바꾸겠다고 죽임을 당하는 일도 없을 테고, 지배층이 말하는대로 그것이 옳다고 쫓다가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억울함을 알게 되어 현실을 잊고 지배층에 항거하다가 죽어간 이들은 또 얼마이던가 말이다. 그저 양반이며 지배층들이 가만히만 있으면. 아니더라도 그저 이대로 죽은 듯 지내도록 세종이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강채윤이 똘복을 버리고 강채윤으로 살고자 한 이유였다. 아버지의 유언이 그러하듯 현실이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것이다. 왕이 어떻고, 양반이 어떻고, 노비가 어떻고, 그것이 현실이라면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사는 것이다. 조금의 인내만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 어차피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게 삶이다.

 

다만 그럼에도 똘복 자신조차 깨닫지 못하는 게 있다. 그것은 세종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세상을 알아 버렸다. 글을 알게 되면서 너무나 더 간절히 세상을 알아 버리고 말았다. 왕을 만나고 사대부를 만나고 백성과 어울린다. 그리고 그것을 보통의 백성들처럼 인내하고 받아들이기엔 그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보통의 백성이라면 설사 아는 이가 불의한 일을 당하더라도 모르는 척 없는 척 지나쳤겠지만, 강채윤에게는 최소한의 지식과 사고할 수 있는 지성과 무엇보다 불의한 것을 지나치지 못하는 힘이 있다. 비록 힘이 없더라도 이미 현실을 알고 분노할 수 있게 된 강채윤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교육 아래서도 조선인 가운데서는 민족주의를 일깨운 이들이 있었다. 근대화된 구일본제국의 황국식민교육은 그러나 역설적으로 더 많은 일본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현실의 모순을 깨닫고 그것을 바꾸려 하는 이들을 길러내고 말았다. 유럽의 계몽군주란 보다 강력하게 나라와 국민을 왕인 자신에 귀속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역시 그러한 과정에서 현실을 일깨우게 된 국민들은 유럽의 군주들에 도전하는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죽임을 당하더라도 현실을 알고 그것을 바꾸려 싸우다 죽임을 당하는 것은 모른 채 그저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가 단지 육체의 죽음이라면 후자는 실존의 죽음이다. 존엄의 죽음이다. 존엄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일깨워진 백성들이 여전히 국왕과 조정의 지배에 만족하며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 신진사대부가 이성계를 구심점으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도 그들이 고려사회가 갖는 모순을 깨닫고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세우고자 하는 열망을 실천에 옮긴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다. 사대부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이성계를 내세워 세운 나라니까. 조선의 건국이란 바로 그러한 사대부에 의한 혁명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러면 사대부가 한 것을 백성은 못하는가? 그러고 나서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남아 있겠는가?

 

물론 세종도 모르고 정기준(윤제문 분)또 모른다. 황희도 모르고, 조말생도 모르고, 심종수도 모르고, 한가놈도 모른다. 혜강도 모른다. 소이도 모른다. 그래서 혁명이다. 그래서 파천황이다. 그 자신조차 의도하지 않은 것이다. 강채윤이 판관이 되는 이유다. 모르지만 강채윤은 이미 그것을 체화하고 있다. 감히 왕이 하는 일에 당당히 대들듯 '지랄'이라 말할 수 있음으로써. 철저히 백성의 입장에서 왕이 하는 것을 판단한다. 판단할 뿐만 아니라 분노하고 조롱한다. 그러한 강채윤이, 아니 똘복이가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보다 쉽게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된 백성들이 하나가이 똘복이처럼 된다면. 그러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뿌리깊은 나무>의 미덕 가운데 하나다. 모두가 세종만 본다. 백성을 가엾이 여겨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들려는 세종의 선의만을 보려 한다. 세종은 성군이라고. 그래서 세종은 대단한 왕이라고. 그러나 드라마는 그 반대편에 선 똘복의 존재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한 세종의 행동에 대해 당당히 '지랄'이라 말할 수 있는 강채윤의 존재를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한 자리에서 마주하도록 만든다. 마주하고 소리높여 싸우도록 만든다. 그 태평성대를 만들기 위해 지옥을 살아야 하는 왕의 책임과 그럼에도 그런 왕의 역할이 피부에 와닿지 않는 힘없는 민초의 입장에서. 훌륭한 왕이란 자체도 차악에 불과하다. 그냥 내버려두면 좋을 것을 누구도 그렇게 놔두지 않으니 차라리 그보다는 훌륭한 왕이 있는 것이 낫겠다. 하지만 그러한 훌륭한 왕조차 백성의 입장에서 불편하고 어색한 것은 마찬가지다. 오히려 더 증오스럽고 원망스럽다.

 

사실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이었다. 강채윤이라고 하는 무지렁이 백성과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군이라 일컬어지는 세종의 부딪힘. 분명 지성으로도 인성으로도 강채윤이 세종에 미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마침내 세종은 강채윤이 다그치듯 쏘아대는 말들에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 만다. 오히려 더 간절이 떠나는 강채윤의 등뒤에 다시 싸울 것을 애원한다. 조선의 주인은 누구인가? 왕이 펼치즌 정치의 주체는 누구인가? 세종의 치세에는 백성이란 있는 것인가?

 

왕조사적이면서도 또한 민중사적이다. 역사를 주도해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힘과 지식을 독점한 지배층이지만, 그러나 그들에 의해 주도되어지는 역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무엇이 백성을 위하는 길인가? 어떤 것이 진정 백성을 위하는 길인 것인가? 백성 강채윤의 입장에서. 노비 똘복의 눈으로. 그는 반대편에서 그렇게 냉엄한 눈으로 세종을 바라보고 있다.

 

정기준과 밀본이 초라해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정기준과 밀본의 이상은 조선이 건국되는 시점에서는 옳았다. 아마 상당기간 옳을 것이다. 사대부에 의해 건국된 사대부의 나라. 사대부에 의해 주도되어 왕권을 견제하며 나라를 바른 방향으로 이끈다. 그러나 그러한 정기준의 이상에는 백성은 존재하는가? 역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고려의 권문세족을 뒤엎고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지만 그의 조선은 그 순간에 머물러 있다. 세종과 강채윤은 그 너머의 더 먼 것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 아무리 재능이 출중해도 정기준은 그래서 보통의 똑똑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는 백정이지만 사대부고, 백정이면서도 사대부일 뿐이다.

 

과연 세종은 성군이었는가? 과연 세종이 백성을 위한다고 하는 뜻이 진정 백성을 위하고자 하는 것이었는가? 왕으로서의 세종을 본다. 백성의 입장에서 세종을 본다. 왕은 단지 왕이다. 왕이 아무리 백성을 위한다고 그가 백성 자신이 될 수는 없다. 그러면 백성을 위한 정치란 어디에 있는가? 그 답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세종이었는가? 세종과 같은 성군이 있다면 백성을 위한 정치는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그에 대해 강채윤은 단호히 '지랄'이라 말한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의의일 것이다. 단지 어느 역사적 시점에만 천착하지 않는다. 그것은 시공을 넘어 현실과 이어져 있다. 세종이면 족한 것인가? 세종과 같은 임금이면 족한 것인가? 그러면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인가? 한글을 두고 그것을 묻는다. 세종의 입장에서. 강채윤, 아니 노비 똘복의 입장에서.

 

백성은 글을 몰라서도 죽고 알아서도 죽는다. 맞아서도 죽지만 때려서도 죽는다. 왕은 그것을 아는가? 왕이 만드는 글자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가? 역사는 그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세종은 그러한 똘복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 그것이 역사며 현실이다.

 

여운이 짙다. 며칠째 계속 성군 세종을 윽박지르는 강채윤의 피맺힌 울부짖음이 귓전을 흔든다. 그럼에도 작은 아이가 철없이 반기는 새로운 글자에 대해서. 생각이 깊다. 향기가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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