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 우리도 욕망하는 것 좀 갖겠다는데 그게 그리 지옥입니까?

까칠부 2011. 12. 9. 09:25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한다. 나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살 것이고, 어디로 갈 것인가? 나란 존재는 과연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이고 어떤 가치를 갖는가? 그래서 종교가 있는 것이다. 철학이 있는 것이다. 과학이 있는 것이다.

 

분명 누군가 들려주는 대답이 있다. 너는 누구다. 너는 백성이고, 임금이고, 사대부이며, 남자이고, 여자이다. 아비이고, 어미이며, 자식이고, 친구다. 그렇게 맞춰 살아간다. 그것을 분수라 부른다.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 삶에 대한 평가는 그가 살아온 모든 과정에 대한 정의다. 자기 자신에 대한 답이 되어 줄 수 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과연 그것은 진정한 나인가? 백성이고, 임금이고, 사대부이고, 남자이고, 여자인, 아비이고, 어미이며, 자식이고, 친구인 그것이 진정한 나 자신인가? 그래서 찾아헤매게 된다. 자신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구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더욱 명징하게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서. 전자가 자존, 후자가 자아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답이 아닌 자기가 찾아낸 답. 바로 개인의 시작이다.

 

개인이란 독립적인 존재다. 필연 다른 이로부터 듣게 되는 답이란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롯된 것일 게다. 모두가 왕이라 하니 왕이고, 백성이라 하니 백성이며, 사대부라 하니 사대부다. 그리고 그에 따른 역할을 강요받는다. 왕은 왕다우라, 백성은 백성다우라, 사대부는 사대부다우라,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그래서 찾는다. 그 모든 것들로부터 유리된 독립적인 자신을. 그것은 필연 그 모든 것으로부터 유리되어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한 무엇일 것이다.

 

그것이 꿈이다. 오롯이 내가 찾은 것.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 어쩌면 내 모든 삶을 던져서라도 이루어야 하는 것. 그것은 때로 자기 자신과도 동일시된다. 인간의 마지막 욕구다. 자존의 욕구에 이은 진정한 자신을 찾으려는 자아실현의 욕구. 그러나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첨예한 이성과 지성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그것을 인지할 수 있을 때, 스스로가 무언가 하고자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담이(신세경 분)를 데리고 도망가지 못한 건, 우리 담이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게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였습니다."

 

강채윤(장혁 분)이 답지 않게 담이(소이), 아니 세종을 위해 그렇게 발벗고 뛰어다닌 이유가 이것이었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다른 어떤 무엇보다 반드시 이루고 싶은 것이 있다. 그저 하루를 살아가기가 버거운 백성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아마 주어진 길만을 묵묵히 가려 하는 대부분의 사대부도 역시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과연 역대 조선의 임금 가운데 그러한 꿈을 가진 이가 몇이나 되었을까? 왕이었기에. 임금이었기에.

 

세종(한석규 분)의 한글창제가 문제가 되는 것이 왜이던가? 그가 왕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성리학의 나라, 사대부의 나라, 조선의 왕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에게 주어지는 책임이 있다. 왕이기에 요구되는 역할이 있다. 한글창제는 그러한 책임과 역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정기준(윤제문 분)이 말하고 있다. 왕이 해야 할 일은 백성을 하나하나 살피고 보듬는 것이지 그들에게 책임을 나누는 거이 아니라고. 정기준이 아니더라도 사대부들이 하나같이 세종의 한글창제를 반대하는 것은 그가 왕이며 왕으로서 해야 할 책임과 역할에 어긋나는 것이라 판단한 때문이었다.

 

사실 과연 한글이라는 것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자기의 꿈을 가지고, 자아를 실현해 갈 수 있을 것인가는 아무도 모른다. 이미 비교할 수 없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있는 지금에조차 과연 사람들은 강요된 답 속에서 진실한 답을 찾아 스스로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가 의문이다. 그것은 한글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육으로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고 학식이 출중해도 정기준 또한 자신이 원해서 밀본의 본원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기회는 줄 수 있다. 배우고 익히고 연마해가는 과정에서 보다 자신에 대해 느끼고 깨달을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생각을 하게 되고, 고민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답을 구하게 되고, 모든 사유의 시작이다. 왕의 궁녀가 되었기에 배울 수 있었고, 왕의 배려가 있었기에 그 배운 것을 써먹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진정 자기가 하고 싶은 무언가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진정 가치가 있는, 진정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일을 찾고 그것에 자신을 걸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이 한글을 만들려 한 것처럼. 소이 역시 세종을 도와 마치 아이를 낳듯 이 글자를 낳아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었다. 모두가 이 글자를 쓰는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욕망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가 바라는 것이며, 그 욕망에 자기 자신이 있다.

 

소이만이 아니었다. 소이와 함께 궁에서 쫓겨난 궁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고 난 다음에 한글이 아무리 널리 퍼진들 이미 죽었는데 당사자들에게 무슨 의미기엤는가? 하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죽더라도 아주 의미가 없지는 않다. 죽더라도 그 죽음조차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백성들과는 다른 사고방식이다. 그것이 강채윤은 신기했던 것일 테지만, 그래서 강채윤도 그러한 소이를 위해 자신을 걸어보려 한다. 아니 정확히는 소이가 꾸는 꿈이다.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은 천한 출신에, 그러나 어느새 꾸기 시작한 그 원대한 꿈이 그를 매료시킨 것이다. 스승 이방지(우현 분)가 말한 백성의 삶과는 배치되는 방식이다. 그렇게 그 역시 목숨을 건다. 백성으로서 어울리지 않게 꿈을 꿀 수 있게 된 소이를 위해서. 그 또한 강채윤의 꿈이며 욕망이었을 것이다. 누구도 아닌 강채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다.

 

정기준이 말한 백성들의 욕망이 풀려날 경우 지옥이 펼쳐질 것이라는 경고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물론 혼란이다. 농민은 농사를 지어야 한다. 백정은 가축을 잡아야 한다. 갖바치는 가죽으로 물건을 만들어야 한다. 사대부는 유학을 공부해야 한다. 그런데 농민이 농사를 짓지 않겠다고 한다. 백정이 더 이상 가축을 잡기를 포기한다. 갖바치가 유학을 배우려 하고, 사대부가 유학은 배우지 않고 장사를 하겠다고 나선다. 그 혼란을 어떻게 감당하려는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한 누군가는 농사를 지으려 할 것이다. 또다른 누군가는 가축을 잡으려 할 것이다. 가죽으로 만드는 물건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나올 것이고, 노비 가운데서도 유학의 즐거움을 알아 그것을 배우려는 이가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단지 그리 해야 하기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과는 다르다. 자발적이다. 능동적이다. 가치가 부여된다. 농사를 짓는 것이 자신의 가치와 직결되며, 가죽을 만지는 것이 자신의 의미와 맞닿는다. 깔끔하게 부위별로 분리된 가축의 고기는 백정의 삶을 증명해 줄 것이다. 단순히 출신이 그래서, 혹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닌 그의 증명이며 의미가 되어 버린다. 장차 노동의 가치는 단순한 생계수단에서 존엄과 자아의 실현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노동 그 자체가 욕망이 되고 추구가 된다. 목적이 된다.

 

만일 그래서 누구도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게 된다면 그만큼 농사일이란 귀한 일이 되어 사람들의 흥미를 자아낼 것이다. 아무도 가죽을 만지려 하지 않으면 가죽을 만지는 일은 그만큼 귀한 일이 되어 또한 사람들을 끌어들일 것이다. 진정 아무런 가치도 없고 누구도 하지 않으려는 일은 역사상 많은 직업들이 그러했듯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만인의 만일을 위한 투쟁은 마침내 질서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자유는 자유에 의해 통제된다. 욕망은 욕망에 의해 통제된다. 혼란은 이내 자율적인 질서를 통해 수렴된다.

 

사실 근대란 그다지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더 도덕적이었고 더 억압적이었다. 그래서 시민주의가 발달한 근대의 유럽에서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여성은 여전히 사회의 변방에 머물고 있었다. 정기준이 이야기한 내용이 당시 부르주아들이 노동자와 농민, 여성을 배척하는 이유로 그대로 쓰이고 있었다. 충분한 교육도 훈련도 받지 못한 무지렁이 노동자, 농민에게 정치를 맡겨서 제대로 될 리가 있겠는가? 여성은 아직 정치적인 판단을 내리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오로지 교육받고 잘 훈련받은 부르주아들만이 그러한 판단을 내릴 자격이 있고 그럴 의무가 있다. 근대 유럽의 자유주의란 바로 이들 부르주아를 위한 자유주의였던 셈이다.

 

그러한 근대적인 엄숙주의를 무너뜨린 것이 현대의 쾌락주의였다. 하나하나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금기가 깨져나가며 사회는 더욱 퇴폐스럽게 타락해갔다. 그리고 그런 만큼 개인에게 씌워진 도덕적인 의무 역시 약해져만 갔다. 반드시 옳지 않아도 된다. 반드시 바르게만 말하고 행동할 필요가 없다. 진정한 개인은 그로부터 출발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항상 말하는 바지만 <뿌리깊은 나무>의 대화들은 너무 멀리 가능 경향이 있다. 정기준은 근대 부르주아의 엄숙주의와 도덕주의를 말한다. 강채윤은 현대의 쾌락주의를 이야기한다.

 

금지된 모든 것을 꿈으로 꾸어 보려 한다. 허락되지 않은 모든 것들을 욕망하려 한다. 그 욕망하고자 하는 욕망을 욕망하다. 욕망을 욕망할 수 있는 자유를 욕망한다. 금기는 깨어져나가고 욕망은 해방된다. 욕망과 더불어 개인 역시 해방된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은 욕망과 만나 더욱 첨예하게 연마된다. 자본주의일 것이다. 자본주의가 반드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와 함께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결국은 개인이다. 욕망하는 개인. 욕망이 욕망과 부딪혀 질서를 이루는 사회. 개인이란 욕망하는 개인이며, 자유란 욕망하는 자유다. 그것이야 말로 개인의 존엄이며 자아일 것이다. 개인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드라마는 그다지 멀리 가지 않는데 보고 있는 필자가 혼자서 멀리 가려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강채윤의 그 한 마디가 그래서 뇌리를 헤집었다. 세종이 추구하는 자유로운 이성과 그러면서도 인간의 욕망을 억누르려 하는 도덕적인 이성,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욕망할 수 있는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의 본능, 드라마는 어느새 현대로 이어지고 말았다. 작가가 생각이 너무 많았거나, 아니면 필자가 생각이 너무 많았을 것이다.

 

정기준의 타초경사에 혼수모어에 대해, 세종은 암도진창으로 대응하려 한다. 세종을 놀라게 하고, 그로써 혼란스럽게 함으로써 기회를 노린다. 세종은 그에 응하는 척 무모한 도발을 시작하고 암중에서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뜻을 이루려 하다. 세종의 폭주는 오히려 정기준이 바라는 바이기에 정기준의 오판을 불러일으키 수 있다. 세종의 폭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새로운 기회를 노리려 한다. 그런데 그러는 사이 세종의 명을 받은 나인 소이와 그녀의 동료들은 은밀하 궁궐을 빠져나가 한글을 민간에 퍼뜨리는 공작을 하고 있다.

 

전염병과도 같은 글자다. 정기준의 그 말은 오히려 세종에게 힌트가 되었다. 전염병과 같다면 전염병처럼 퍼뜨리면 된다. 복잡한 고민 할 것 없이 백성들 사이에 던져 놓고 자연스레 퍼지도록 하면 된다. 더불어 정기준이 광평대군을 죽여 세종을 놀라게 만들었다면, 세종은 정기준이 의도한 대로 폭주하면서 정기준의 주위를 들쑤셔 밀본을 드러나게 만드다. 세종을 놀래키기 위해 광평대군을 살해한 것이 도리어 이신적(안석환 분)과 심종수(한상진 분)등 밀본 자신을 놀라게 만들었다. 놀라서 동요한 가운데 세종의 명을 받은 조말생(이재용 분)마저 들쑤시니 혼탁해진 연못 가운데 물고기는 반드시 숨을 쉬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야말로 절묘한 머리싸움이랄까?

 

마침내 이방지가 죽었다. 당대의 조선제일검 무휼 이전의 조선제일검. 젊었을 적 무휼조차 이방지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카르페이(김성현 분)와 싸우기에는 이미 너무 늙었다. 아무리 대단하 고수라도 세월의 흐름은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칼밥을 먹으며 살아온 인생 마침내 누군가의 칼에 이슬이 되어 제자의 품에서 눈을 감았으니 여한은 없을 것이다. 조선제일검이었고 그 검을 뛰어넘는 적을 만나 겨루다 죽임을 당했다. 평생의 적이었던 조말생이 도리어 이방지를 숨겨주고 치료까지 해 준 것이 칼로서 쌓은 무사의 정에서 비롯되었던 것처럼. 다만 그렇다 해도 제자로서 정이 있는 강채윤의 원한마저 어쩌지는 못할 테지만 말이다.

 

조말생에 대해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게 된다. 차라리 자신이 고문받는 쪽이 나았을 것이라며 고문하는 흉내만 내는 어려움을 토로하던 모습에서. 나인들이 감탄할 정도로 조말생의 고문솜씨는 일품이었다. 그토록 적대하던 이방지지만 그의 마지막을 보낸 것은 조말생의 방이었다. 태종의 신하였으나 태종의 명에 의해 세종에게 충성을 바치는 그 올곧음. 역사와는 다른 매력이 있다.

 

역시 생각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드라마 스스로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케 만든다. 인간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사실 누가 옳고 그르고란 없다. 정기준도 옳고, 세종도 옳다. 그 수단의 과격함 또한 하나의 필연이다. 과연 이 방대한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되려는가. 끝이 다가올수록 그저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이미 중독되어 있다.

 

윤평(이수혁 분)의 소이에 대한 마음이 참 공교롭다. 아마 그래서 윤필을 죽일 당시 소이와 마주치고서도 그녀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던 것일 테지만. 강채윤으로부터 밀본지서를 빼앗기 위해 소이를 잡아두고 이용하려 하는 과정에서도 의외로 소이에게는 상당히 물렀었다. 다만 그로 인해 세종의 계획이 드러난 것은 극적 아이러니일 것이다. 흥미롭다. 소이에게는 강채윤이 있는데.

 

재미있었다.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글창제라는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그를 둘러싼 세종 등의 실존인물들을 통해서, 최만리가 잡혀가 국문을 당한 것도 역사적 사실 그대로다. 역사적 사실을 섞어 작가가 하고픈 말을 풀어놓는다.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 깊고 방대하다.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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