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 나는 백성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미워했다!

까칠부 2011. 12. 8. 09:25

분노와 증오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르다. 분노는 전제하는 것이다. 증오란 단정짓는 것이다. 세종(한석규 분)과 정기준(윤제문 분)의 백성에 대한 태도가 그것이다.

 

"저들(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너희들(백성들)은 세살박이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향해 그저 떼를 쓰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정기준은 더 이상 백성들에게 기대를 갖기를 포기하고 그들은 단지 객체로써 대상으로써만 보듬고 이끌려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정기준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세상을 나누며 함께 역사를 만들어나갈 동반자가 아니다. 오로지 타인일 뿐이다.

 

그러나 세종은 그런 가운데서도 백성들을 위해 글자를 만든다. 배우고 익히고 깨우치라. 세살박이 아이에서 열 살 먹은 아이로, 열댓 살 먹은 소녀로, 스무살 먹은 청년으로, 그래서 굳이 이리 마음쓰고 보살피지 않더라도 홀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무한한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조차 무한한 사랑을 베풀지는 않는다. 신의 사랑에도 조건이 붙는다. 임금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니 모두의 사랑이 마찬가지다. 다만 그러함에도 기대를 버리지 않고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이 분노다.

 

시험을 망쳤다. 시험성적이 말도 안되게 형편없이 나왔다. 어머니가 화를 낸다. 이것밖에 점수를 받아오지 못했느냐고. 하지만 정작 다음 시험에서 시험점수가 오른다면 어머니는 다시금 아이에게 웃음을 지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미운 게 아니다. 증오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금의 아이의 모습이 자기의 기대와 믿음에 미치지 못해 화가 났을 뿐이다.

 

그런데 만일 아이가 더 이상 어머니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면? 기대를 갖게 하지 못한다면? 아이를 위해 선물을 사주고, 적지 않은 용돈을 주고, 좋은 학원과외선생도 알아본다. 오로지 자기가 시키는대로만. 자기가 계획하고 이끄는대로만 아이는 따라오면 된다. 그것은 과연 사랑인가? 전제도 조건도 없이 단지 일방적으로만 베풀려 든다. 들으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아예 돌아보지 않는 것도 증오지만 이처럼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증오의 표현이다. 아이를 위해 베푸는 것은 단지 자기만족에 불과할 뿐. 그것은 부모로서의 의무에 지나지않을 것이다.

 

세종의 사랑이 그러하다. 실망했다. 실망해서 분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체념하지 않았다. 체념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글자를 만들었다. 더 이상 실망하기 싫어서. 분노하기 싫어서. 그들을 싫어하는 것이 더구나 너무나 싫어서. 충분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여긴다면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이고 마음쓰이고 걱정되어도 칼 한 자루 쥐어주면 알아서 스스로를 지킬 것이다. 충분히 가능한데도 계속해서 마음쓰느라 지치는 것은 스스로의 사랑을 마모시키는 것이다. 언젠가는 지치고 상대를 싫어하게 된다. 아이를 더 미워하기 전에 때려서라도 가르치고 바로잡고 싶은 부모의 심정이 그러하다. 그래서 전제라 하는 것이다. 더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사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조건이 필요하다. 그는 단지 백성들에게 화가 나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정기준은 어떠한가? 백성의 자존과 자주성을 철저히 무시한다. 그들은 단지 객체라. 타자라. 아무런 기대도 않는다.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는다. 믿음도 없다. 충분히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연인을 계속해서 바래주려 하는 것은 구속에 다름 아니다.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를 주체로써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그는 백성을 증오한다. 다만 사대부라고 하는 그의 정체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흔히 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이를 사랑한다면 매를 아끼지 말고, 아이를 미워한다면 떡을 하나 더 주라. 질책과 다그침이 있을 때 아이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아이에게 화난 이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고 바로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반면 단지 맛난 것만을 주려 한다면 아이는 아무런 반성도 고민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영영 화난 그대로 있게 된다. 화나고 마침내 미워하게 된 그대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 그래서 화가 나 있음에도 세종은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끼려 함에도 정기준은 백성을 증오하는 것이다. 사랑하기에 화가 나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기에 화조차 나지 않는 것이다. 체념이란 증오의 시작이다. 아무 기대도 믿음도 희망도 없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정기준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 인류사회의 오랜 화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시민들은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히틀러와 나치를 권좌에 올리고 그들이 저지르는 모든 행위를 지지하거나 최소한 방관하고 있었다. 수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당할 때도, 소련에서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을 때도, 장애인과 집시와 사회주의자 등 사회의 소수자들이 나치에 의해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처형당할 때 그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가장 철학과 과학이 발달한 가장 근대화된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당장 지금 우리 사회의 인터넷 문화만 보더라도 그렇다. 그것이 과연 사실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과연 명백한 사실인가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듣고 싶은 것만을 듣는다.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다. 그것을 들려주는 몇몇의 선동에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넘어가고 만다. 단지 어느새 주어진 권력에 취해서, 그래서 주어진 권력으로 정의를 행한다는 도취감에, 집단은 그들의 죄의식을 마비시킨다. 사람이 죽어도 단지 대상만 바뀔 뿐, 익명의 공간 속에 제어가 풀린 그들의 욕망과 이기는 항상 희생양을 찾아 그것을 충족시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한다. 대중에 대해서. 다수에 대해서. 과연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인가? 인간이 집단을 이룰 때 여전히 이성적일 수 이는 존재인가? 물론 다수이기에 더 나은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다수이기에 잘못된 판단조차 제대로 검증되지 못하고 실행되어지고 마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 다수란 권력이기 때문이다. 전제왕조에서 왕의 잘못을 가리기가 어려운 것처럼, 조선사회에서 사대부의 잘못을 밝힌다는 것도 쉽지 않다. 다수가 권력이 되었을 때, 그 다수의 힘에 맞서 그것이 잘못되었다 바로잡기는 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아직 채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권력을 손에 쥐어준다는 것은 옳은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가운데 하나다. 민주주의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체제가 아니다. 도덕과 윤리, 정의, 질서를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전체주의나 전제주의에 가깝다. 신정국가라면 더 그러한 목적에 부합할 것이다. 항상 옳아야 하고, 항상 바라야 하고, 그래서 한 점 틀리는 것이 없어야 하고. 그럴 것이라면 세종과 같은 뛰어난 군주에게 권력을 맡기는 것이 옳을 것이다.

 

칸트가 이성과 도덕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비슷한 시기 인간의 충동과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던 이가 있었다. 마르퀴 드 사드, 사디즘 할 때 그 사드다. 그는 도덕적 판단이 배제된 인간의 욕망을 탐구하려 했었다. 직접 실천에 옮기기까지 했었다. 이 또한 인간이다. 도덕정 명제를 추구하는 당위로서의 존재가 아닌, 단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할 뿐인 하나의 생물에 불과한 것이다. 욕망마저 인간의 한 부분으로 인정되었다. 마르퀴 드 사드는 이후 20세기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재발견되었다. 인간은 이성과 도덕의 동물인 동시에 충동과 욕망의 동물이다. 항상 옳아야 하고 바라야 하는 존재가 아닌 얼마든지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설사 잘못된 판단을 내리더라도 그 결과는 결국 모두가 지게 되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의 결과 독일은 폐허가 되었고 많은 독일인들이 학살당하고 평생 남을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들이 선택한 결과다. IMF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지만, 결국 그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정부의 수반을 뽑아 올린 것은 바로 대한민국 국민의 선택이었다. 무모한 테러와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미국의 현재 역시 마찬가지다. 분명 현명한 판단이라 말할 수 없는 상황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 역시 스스로가 책임을 지게 된다. 그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배우지 못한다면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가 범하는 오류란 사회의 구성 자신들에게 지워지는 책임이자 징벌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도저히 안 되면 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가 파탄나고, 사회가 혼란스럽고, 국가라고 하는 시스템이 한계에 이르면 그대로 망하면 되는 것이다. 그 또한 국민 스스로가 짊어질 몫인 것이다. 과거 단지 왕이 물러나고 귀족이 죽는 것으로 그 책임을 다했다면, 국민 스스로가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만큼 그 결과 역시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다. 그러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현명하고 지혜로운 몇몇을 선택해 그들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책임을 지우면 된다. 독재의 시작이다. 독재란 다름아닌 그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 책임지고 판단할 수 없으리라는 불신과 체념의 표현인 셈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 책임지고 판단할 수 없으니 누군가가 대신해야 한다.

 

사실 정기준과 같은 경우를 적잖이 보아 왔었다. 진보적인 지식인 가운데 그런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은 옳은 주장을 하는데 대중이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 자신들은 지혜롭고 탁월한 의견을 고민하여 말하는데 대중은 무지하여 그것을 전혀 알아주려 하지 않는다. 실망하고 분노한다. 정의롭고 도덕적인 이상이 높은 경우일수록 실망은 절망이 되고 그들을 체념케 한다. 그리고 철인정치로 이어진다. 소수의 지혜로운 이들이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

 

진보적인 지식인 가운데 생각이 바뀌어 대중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돌아선 경우가 많은 것이 그 때문이다. 옳아야 하니까. 바라야 하니까. 그런데 대중은 그러한 이상을 따라주지 않는다. 종교와 보수가 쉽게 친해지는 이유도 그것이다. 종교란 가장 명징한 정의이고 도덕이다. 가장 고귀한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기준이라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과연 백정으로 살면서 그 고귀한 도덕적 이상에 백성의 탐욕스런 삶이란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아무튼 정기준의 지적은 그래서 현재에도 유효하다 할 것이다. 분명 선거 때 후보자들은 공약을 낸다. 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정보가 제공되고, 그가 당선되어 어떤 일을 하려는가에 대한 약속이 제시된다. 그렇다면 그에 맞게 뽑으면 되는 것이다. 만일 공약과 다른 행동을 한다면 그에 대해 비판하고 공약을 지킬 것을 요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순리다. 그런데 정작 공약은 보지도 않고 표를 주고 뽑아놓고서는 공약대로 하려 한다고 비난부터 퍼붓는다.

 

부정한 정치인인 것을 안다. 그동안 부정부패로 인한 문제가 적잖이 드러났었다. 개인의 도덕성이나, 혹은 정치적인 성향이나, 정책적 지향에 대해 최소한 재선 이상이라면 오히려 모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데도 여전히 표를 주어 뽑아주고서는 제 마음대로 해주지 않는다 비난한다. 정치인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며. 민주주의라는 제도에 따라 스스로 뽑은 정치인임에도 그들을 부정하고 조롱하기를 오히려 즐기기까지 한다. 그럴 것이면 진정 존경할만한 정치인을 뽑아 그에게 권력을 쥐어주던가. 단지 국민이라는 이유로 표를 주어 뽑아주고 전혀 다른 정책과 행동을 요구하며 비난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뻔뻔함인가?

 

하지만 그조차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민주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앞서도 말했다. 그래서 도저히 안된다면 망하는 것도 책임지는 한 방법이라고. 왕 하나만 죽이면 그만인 전제왕조가 아니다. 국민 모두가 함께 책임져야 하는 민주주의다. 그 무서움을 과연 정기준만큼이나 느끼고 깨닫는 국민이 - 아니 시민이 우리 사회에 몇 사람이나 될까? 정기준의 저러한 비판이 우리 사회에서 과연 무용한가? 오만인가? 세종조차 그래서 정기준을 마냥 부정하지만은 못한다. 최소한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정기준의 말이 훨씬 사실에 부합할 테니까. 이미 강채윤(장혁 분)을 통해서도 백성의 삶이 어떠한가를 명징하게 보여준 바가 있었다.

 

어쨌거나 그래서 세종은 왕이었던 것이다. 가장 사랑하던 아들이었다. 가장 사랑하던 아들인 광평대군(서준영 분)이 그렇게 한 순간에 목숨을 잃었음에도 그는 슬퍼할 수조차 없다. 왕인 때문이다. 왕이 슬퍼하는 동안에도 세상에는 왕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정기준의 말이 옳았다. 세종은 왕이었다. 그리고 왕이라는 사실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고 있었다. 지옥이라고 말할 정도로 왕으로서의 그의 삶은 지옥이었다. 아들이 그리 죽어 사무치도록 슬픈데도 슬퍼하는 것조차 '지랄'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그에게는 전혀 타인을 위한 일들이 왕인 그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는 왕이다.

 

과연 세종은 왕일 것인가? 아니면 아들의 아버지일 것인가? 광평대군의 죽음에 대한 세종의 판단이 궁금하다. 단지 아비로서 아들의 복수를 하려 할 것인가? 아니라면 왕으로써 자신의 책임을 다하려 할 것인가? 물론 그렇더라도 밀본은 제거되어야 한다. 정기준은 죽어야 한다. 다름아닌 왕 세종의 조선을 위해 반드시 그리 되어야 한다.

 

정기준이 극단을 선택했다. 어지간해서 아무리 적대관계에 있더라도 최소한 고귀한 피에 대해서는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다. 정기준이 광평대군에게 그 상황에서도 큰절을 하고 공대를 하는 것이 그래서다. 왕족에게는 고문조차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런데 왕족을, 그것도 왕의 아들을 사사로이 죽인다. 그것은 왕의 권위에 대한 부정이고 전면적인 도전이다.

 

정기준과 밀본은 그러면 기득권인가? 사대부는 기득권인가? 그보다는 당시 시대에 맞게 생각해 본다면 왕과 귀족으로부터 지식인인 사대부가 권력을 가져오는 과정이라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전히 권력은 왕과 소수의 문벌에게 독점되어 있다. 사대부란 출신보다는 학식과 인품으로 결정된다. 지방의 지주이면서 유학을 습득한 지식인이면서, 기득권이라면 왕을 기득권이라 해야 하리라. 사실은 밀본이 주장하는 재상총재제 자체가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진보적 사상이었는데, 지금의 눈으로 보니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지키려는 수구적인 모습으로 보인다. 왕의 독단에 의해 움직이는 전제왕조에 대한 부정이 밀본을 수구적 집단으로 여겨지게 만든다.

 

확실히 대사들이 너무 멀리 간 느낌이다. 당시로서는 전혀 생각조차 못했을 개념들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이것은 현대에 이르러 과거를 돌아보며 쓸 수 있는 말들이지, 당시에 불확실한 미래를 내다보고 할 수 있는 말들이 아니다. 지금에조차 아직 답은 나와 있지 않다. 작가의 생각이 어쩌면 사극으로서의 드라마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가? 물론 의미있는 대화들이기는 했다.

 

백성이 자신들의 지도자를 뽑는다. 사대부는 이미 이성계를 자신들의 왕으로 선택했다. 이방원을 왕으로 선택했고, 장차는 단종이 아닌 세조를 자신의 왕으로 선택할 것이며, 중종을 선택하여 왕위에 올리는 이들이 나올 것이다. 경종은 노론에게 왕이 아니었다. 다름아닌 사대부의 선택이었을 터인데. 민주주의에 대한 예상이라기보다는 사대부의 방식을 백성들이 닮아가지 않을까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을까? 성리학이 확산되면 백성은 사대부를 닮아가게 된다. 한글은 그 과정을 보다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정기준 자신에게 세종이 왕이 아닌 이도인 것처럼.

 

세종과 정기준의 토론과 무휼(조진웅 분)과 카르페이(김성현 분)의 대치, 그리고 강채윤과 윤평(이수혁 분)의 대결, 정륜암 위에서의 잘면은 한 폭의 잘 벼려진 그림과도 같았다. 그리고 아들 광평대군의 죽음을 맞아 아들의 팔을 목에 둘러 일으키려다가 멍하니 떨어지는 팔을 바라보는 세종의 모습에는 소름마저 돋으려 했었다. 과연 이래서 한석규로구나.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허무와 절망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아버지의 마음이로구나.

 

초반 세종과 정기준의 대결과 후반 광평대군의 죽음이 드라마를 지배했다. 나머지는 그다지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그 두 장면만으로도 한 편의 드라마를 다 보았다. 가끔 대사가 넘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최고의 배우들의 최고의 연기가 있어 몰입을 더한다. 몰입하며 보게 한다.

 

재미있었다. 정륜암 위에서의 대결은 극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광평대군의 죽음은 비극을 심화시킨다. 비극 위에 세종과 정기준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진다. 심장이 멎을 것 같다.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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